이 세계에는 무수한 갈라섬이 있다. 가령 여성과 남성, 기계와 인간, 사물과 생물처럼 외부의 구별에 의해 갈라서는 개념과 존재들이 있다. 양 끝으로 갈라선 대립쌍은 저마다의 규칙과 질서를 구성한다. 이렇게 파생된 대립쌍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을 유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번 선택의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으며, 특정한 선택이 지체되는 경우에는 다소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자거나 남자여야 하고, 특정한 인종이어야 하고, 척삭동물이어야 한다. 어느 한 쪽에 존재를 고정시키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그 명확함(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이 세계에 온전히 자리할 수 있는 자격요건이 된다. 적어도 이분법의 논리로 직조된 세계 속에서는 그러하다.
내가 나라고 믿는 것들의 바깥은 대개 번잡하다. 자의식이라는 원심력 바깥으로 무수한 것들이 잘려나가고 휩쓸려간다. 때론 가장 가까운 곳으로 돌아와 성치 못한 모습으로 복귀하려 든다. 그것은 감정일 때도 있고 사람일 때도 있다. 우린 그것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비극과 스토리텔링을 마주해야 하고, 때론 적극적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받아들여야 할 것과 배제해야 할 것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견고하게 쌓아둔 자의식의 성곽을 애써 수호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무수한 구별 끝에, ‘나’라는 최소단위에 소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을 구분하는 것에 끊임없이 생을 소진해가면서도, 우리는 ‘나’라는 울타리의 바깥이 매번 궁금할 수밖에 없다. 바깥을 거닐고 있는 저 누군가의 얼굴은, 때로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감지되기도 한다. 마침내 나를 매혹하는 저 사람은 어딘가 나와 닮아 있다. 그 외엔 어떤 확신도 내릴 수 없다. 그는 분명 아토포스1)이다. 나는 그를 특정한 군에 분류할 수도 없고, 특정한 의미의 처소에 고정해둘 수도 없다. 그는 내 고정된 의식체계(언어)를 뒤흔들고, 내 정서는 그로 인해 기꺼이 충전되거나 마비되곤 한다. 모든 종류의 수식어는 그를 표현하기에 다소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그는 내 일상에서 유일하게 상투적이지 않은 것이다. 대개 사랑이 그렇듯이, 어떤 감정은 그 대상만의 독창성을 발견할 때 시작된다. 나는 마침내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고, 움켜쥐고 싶었던 손을 기어이 잡아채고 만다.
절뚝거리는 이인삼각
그러나 잡아채는 순간 시작되는 부패가 있다. 마치 꽃처럼 호명되는 바람에 익명의 뜰에서 뜯겨 나온 누군가가 내 앞에 선다. 연인은 당장엔 아름다우나, 조금씩 시간의 손길에 의해 상해가고 있다. (어쩌면 훼손되어가기에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촘촘하게 구성되는 감정의 다발은, 마침내 건조하게 말라가 한쪽에 전시되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수납될 수 있는 방식으로 모양새를 바꾸는 것이다. 기이할 정도로 도구화되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구리에서 칼처럼 자라나는 것이다2).
그것은 각자의 요청에 기적적으로 부응했던 시절이 희미해질 때쯤, 그토록 참신했던 두 사람의 관계성에 텅 빈 기호가 오갈 무렵에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비수의 형태로 자라나는 것은, 다름 아닌 관계의 상투성이다.
그렇다면 칼이 되어 나타나 둘을 위협하는 상투성이란 무엇인가. 상투성이라는 것은 비단 연인뿐만이 아니라 가족, 친구, 동료를 비롯해 그 어떤 관계든 간에, 대상이 ‘그곳’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뿐더러 그를 특정한 군에 분류하고, 수납해두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이 갱신되지 않을 때, 관계에 대한 의의는 가장 비천한 장소에 고정되고 만다. 그는 고정해두고 나는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단 한 조각의 평범한 사실이 불쑥 파고들어, 마침내 그 관계만의 내향성을 위협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투적이지 않기 위해, 차라리 기형에 가까운 형태로 남아 스스로를 보존하려 하는 감정도 있을까. 자의식 바깥으로 밀어내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균열하기 직전에 얽혀버리고 만 몸(혹은 마음)도 있을까. 나는 그에 대한 해답을 온윤의 시에서 구하고 싶었다. 그러므로 한때 둘이었던 것이 한 몸으로 뭉뚱그려진 채, 이곳저곳을 하염없이 뛰어다니는 행보를 쫓아다니며, 둘(혹은 그 이상의 것들)이 유착되어 있는 그 몸이 사랑의 전형인가, 기형인가 오랫동안 궁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랑에 전형과 기형을 구분하려는 시도만큼 무색한 것도 없을 거라고 애매한 귀결을 내리며 말이다.
어쩌면 이 글은『햇볕 쬐기』에 드러나는 시적 화자가 얼마나 독특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그 피부 위에 새겨진 균열의 자국이 어떠한지 묘사하는 것에 그칠지도 모른다. 그것은 둘이자 하나이다. 특정한 운명을 공유하는 남녀추니일 때도 있고3), 마치 이 세상에 남은 최후의 짝수처럼 보조를 맞추며4) 끝없이 배회하기도 하며, 상대(혹은 스스로의 일부)를 미처 연습하지 못한 불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토록 기이하게 맞물려 있는 신체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균열, 독창성
우린 이제, 이 시인이 존재의 근거를 어디에다 놓는지 가늠해봐야 한다. 언뜻 견고해 보이는 1인칭의 언술 속에 내재된 균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사실 완벽한 1인칭이라는 것은 엄연한 허상일지도 모른다. 있는 힘을 다해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원심력에 존재를 근거하여 소속되고자 하는 시인이 있다면, 반면에 구별의 테두리를 무화시키고 제 몸의 가지를 새들의 중력으로 삼는 시인도 있다5).
때론 이 헌신에 종교적인 뉘앙스가 가볍게 스칠 때도 있다. 애초에 둘이라는 것은 집단이 될 수 있는 최소단위인데, 이 시집에 나오는 둘은 그 단위의 형식마저 무너뜨리고, 맹렬하게 하나가 되고자 한다. 둘이었던 것은 갈라지려던 바로 그 자리에서 이어 붙었다. 목소리는 균열의 자리이자 이음새인 바로 그곳에 깃들어 있다. 시인은 그 흔적을 지우거나 뭉개려 하지 않고, 가장 정직하게(그러나 첨예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차라리 그곳에서 문양이 되어 살아남는 에너지를 본다. 그것은 결국 신학적인 형태의 우화로 남게 된다.
본래 하나였던 것을 끊임없이 쪼개고 대립시키는 힘으로부터는, 신의 손길을 연상할 수 있다. 그 압도적인 제약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의지란 무엇인가? 태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양 끝으로 갈라 구분 짓는 손길이 있고, 그 힘이라는 것이 상정한 규율과 질서가 있다. 세계의 시들은 그에 대한 저항이다. 자유롭게 해방될 것만 같다가 차라리 제 자리에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이다. 외부의 질서에 흡착될 바에야 그 자리에서 녹아 흘러내리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저항을 독창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실 독창성이라는 것은 온전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온한 곳에서, 제 몸 깊은 곳에 균열을 내재하고 있는 것들에게서 나타난다. 『햇볕 쬐기』의 시편들은 단순히 외부에 의해 일어나는 균열에 대항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온전해 보이는 서정의 외피 안에서 은근히, 그러나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균열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이 시집의 커다란 성취 중에 하나는, 존재의 유착과 균열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데서 오는 긴장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독창적이다. 이분법이라는 제약(신의 손길)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시도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특정한 장소나 결론에 가둬두지 않으려는 태도 역시, 삶에 누적되려고 하는 상투성을 부단히 철수하려는 태도도 읽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다. 이쯤에서 시집 중반쯤에 나오는「공통점」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이 시는 쓴 사람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다소 메타(meta)적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표현이 그렇다.
서로를 위해 정성스럽게 만들고 있는 예쁜 독약을
둘이 먹다가
두 사람 모두가 죽는다면
미안은 누가 처음으로 했던 말일까
용서는 죽인 사람이 돌아왔던 흔적일까
돌아갈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몰래 뒤돌아본 적 있어
맨눈 위로 떨어지는 빛을 보며 아파본 적 있었다
오직 텅 빈 배후만이 남아 있는
그 환한 거리에서
누군가 반드시 들어주길 바라며
누구도 필요 없다고 외치는 목소리처럼
맹렬하게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를 찌르던 두 사람이
비로소 하나가 된다면
외로워지겠지
그리워질 것이다
―「공통점」 부분
나는 여기에 나온 ‘예쁜 독약’이라는 표현을 처음 보았을 때, 자연히 ‘drug’처럼 치료제이자 독으로써 작용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늠하게 되었다. 그것은 관계에서 이중의 가능성으로 작용되는 ‘무엇인가’다. 애증일 수도 있고 텅 빈 호의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맥락으로 이 시를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하다.) 거듭해서 읽어보았을 땐 언어학적인 접근과 해석도 가능해 보였다. ‘예쁜 독약’이라는 것은 언젠가 플라톤이 언급했던 파르마콘(pharmakon), 즉 문자와도 닮아 있는 것이다. 문자는 아무리 쓰이고 쓰여도 언제나 불충분한 것이고, 기억을 보완하는 대체재와도 같지만 결국엔 (대체재이기 때문에) 망각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적인 기호이자 흔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는 생명이 없고, 고아이고, 무력하다6). 그것은 미세한 자국을 남기며 배회하는 것이다. 예쁜 독약, 즉 문자를 나눠 마신 두 사람은 사실 갈라진 내면을 품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이다. 어찌 보면 이 시는 둘 이상의 존재들로 뒤엉킨 채로, 제 안에서 죽고 재생하기를 반복하는 한 사람의 분투를 담은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시인은 그 무수한 환생을 멈춘 어느 아침에, 이 세계라는 형식이 가진 윤리적 무력함에 대해 마침내 ‘용서’하기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용서는 결국 ‘흔적’이 되어 남고, 그것이 가진 궤적은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되어 살아남았다.
끝으로
나는 사실 이 시편들 뒤에 있는 시인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비단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매일 한 뼘씩의 볕을 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온윤의 오랜 친구이자 ‘공통점’이라는 이름의 동인으로 함께해왔던 사람으로서, 시 속에서 힘겹게 뒤엉킨 채 비탈길을 미끄러지고 있는 이인삼각의 신체를 보고 있노라면 지금까지 함께 해왔던 행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주 가끔씩 이런 것들이 궁금하기도 하다. 언제까지 읽고 쓰는 일을 함께할 수 있을까? 때론 미래의 강변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우리가 보고 싶구나. 영원과 끝에 대해 말하고 있는 친구의 시를 읽고 있으면, 그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가 끝을 연습하는 장르라는 것은 빈번하게 말해 왔지만, 그 사실을 문득 새롭게 곱씹게 된다. 불가능한 일에 가까운 그 연습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의 손에 걸쳐 부단히 진행되어온 것이다. 나는 이제 그 바통을 친구가 쥐고 달려가는 것을 본다.
영원이라 믿었던 사람이 실은 영원이 아니라고 했다
보름이 지나면 달이 기울 듯 영원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은 뒤에야 영원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십오행」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