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Warmest Regards*
 
김나연

   엄마의 부고를 들은 것은 2019년 3월 1일 오전 10시쯤이었다. 엄마가 죽었다는 경찰의 전화를 받고 나서 잠시 멍해 있었다. 이상했다. 엄마랑은 새벽까지 연락이 됐었는데. 나는 친구들과 졸업여행으로 강원도에 온 상태였고, 엄마는 새벽에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카톡을 남겼다. 그리고 그게 엄마의 유언이 되었다.
가는 길에는 택시를 탔다. 친구들이 배웅했고, 택시 기사는 내게 왜 혼자만 가느냐 물었다. 엄마가 돌아가셔서요. 나는 말했고 택시 안은 정적이 흘렀다. 성남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고등학교 친구가 울며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울지 마, 오히려 위로해줬다. 그때까지도 나는 울지 않았다.
   큰 충격을 받으면 울음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나는 무언가에 취한 사람처럼 멍했다. 처음에는, 성남에 있는 장례식장에 갈 때까지만 해도 엄마가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죽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엄마는 절대 나를 혼자 두고 갈 사람이 아니었다. 여행이 끝나는 날 터미널로 마중을 나오기로 했었는데.
   그 이후의 기억은 드문드문 있다. 나는 장례식장에 가기 전 짐을 챙기러 용인에 있는 본가로 향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성심빌라. 나와 엄마 둘이 살았던 그 집은, 엄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먹다 남은 콘치즈가 올려진 술상, 어질러진 침대,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엄마의 옷들. 나는 그것들을 멍하니 보다가 샤워를 했다. 몸이 찝찝했다. 슬프다는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냥 멍했고, 몸이 끈적거려서, 담배를 피우며 샤워를 했다.
   내 핸드폰과 엄마의 영정 사진이 될 사진을 두고 왔다는 사실은 장례식장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숙모는 내게 화를 냈고 사촌오빠가 애가 정신이 없을 수도 있지, 왜 그래, 했다. 나는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고 있기만 했다. 숙모는 내게 엄마의 핸드폰을 주며 영정 사진으로 할 만한 사진을 찾으라고 했다. 나는 엄마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 보정을 너무 많이 해 얼굴이 너무 하얗게 변한 사진을 골랐다(이것은 농담이다).
   장례식은 무언가 사색에 젖을 만한 시간은 없었다. 고맙게도 친구들이 많이 와주었다. 나는 그들이 없었더라면,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한 번쯤은 쓰러졌을 것이다. 그들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덕분에 내 편이 하나도 없는 장례식장에서 기운을 낼 수 있었다. 이 글을 통해 장례식장에 와 준 친구들, 연락을 준 친구들, 마음속으로 위로해 준 친구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엄마의 부재는, 많은 사람이 그러겠지만,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변곡점이 되었다—그것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느 부분에서는 오르막이 되고, 어느 부분에서는 내리막이 되었을 것이다—. 과거의 나를 생각해보면 참 웃긴 일이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엄마의 죽음을 그토록 바랐으니까. 그토록 바랐던 일이 벌어졌는데, 영화 < 데몰리션 >에서 매미나방에게 심장을 먹힌 데이비스처럼, 어느 부분이 비워진 것처럼 되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징조가 있고 나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엄마의 죽음을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은 내게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나는 당분간 온전치 못한 상태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엄마를 그리워했고,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나는 엄마를 어느 정도는 사랑했던 것 같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랑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간 엄마에게 느꼈던 감정을 사랑이라고 봐야 할지 자문할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은,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나는 엄마를 어느 정도 사랑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감정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졸업한 후 나는 용인에 있는 본가로 가 혼자 살았다. 혼자 밥을 먹었고, 카페에 가 소설을 썼다. 가끔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의 부재를 소름 끼치게 느껴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빨간 버스 안, 나는 무의식적으로 엄마의 전화를 기다렸다. 이제 나가면 되겠니, 묻는 엄마를 기다렸다가, 아, 엄마는 없지, 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이 세상이 무서워졌다. 인생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것은 내 허세에 불과했던 것이다.
   혼자 밥을 먹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그것은 익숙하니까.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들, 이를테면 엄마의 죽음 이후 처리해야 할 일들은 나를 불안에 빠트렸다. 나는 용인에 혼자 있으며 수많은 감정을 느꼈다. 나를 두고 떠나가버린 엄마에 대한 원망, 절망, 불안과 같은 것들. 어린애 같다고 스스로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린애가 맞았다. 정신적으로 독립한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엄마의 핸드폰으로 엄마의 흔적을 본 적 있다. 그때 엄마는 구글에 화장대를 검색했었다. 화장대. 대학을 졸업하면 용인에서 같이 살아야 하니, 엄마는 내 방을 꾸며주기 위해 화장대를 사겠다고 말한 적 있었다. 하얗고 깔끔한 화장대. 여러 개의 검색 기록을 보다가 나는 죽고 싶을 정도로 슬퍼졌다.
   엄마를 사랑했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 기록에 대해 어떤 의미 부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화장대를 고르는 데 열심이었네,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사랑인가. 그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 시간을 쏟고, 그 사람과의 기억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기록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은 없다.
   내가 엄마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리워한다고 생각한 적 있다.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은 늘 있었고, 엄마를 그저 돈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이라고도 생각해본 적 있었다. 누구의 말마따나 나는 엄마의 등골을 빨아먹는 자식일지도 모른다. 나는 인정한다. 나는 엄마의 등골을 빨아먹다가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한 자식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엄마는 당신의 입으로 나를 실수로 낳은 자식이라고 했고, 그때부터 나는 엄마를—우습지만—미워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는데.
   아무도 없는 집,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를 짓누르는 감정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는 괜찮아질 것 같았다. 엄마를 원망하다가도 내가 진짜로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엄마가 죽기를 바랐는데, 막상 이 세상에 없으니 믿기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내게 전화할 것 같다. 어딘지 묻고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물어볼 것 같다. 잠시 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가 죽은 후 몇 년 동안 일련의 사고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 후로는, 엄마는 이 세상에 없다는 자각만이 남았다.
   너무 힘들었던 어느 날에는 엄마가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상상하곤 했다. 이게 다 몰래카메라일 것이라고, 나를 더 굳건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모두가 날 속이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현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엄마의 죽음으로 나를 속이지 않았다. 엄마가 죽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 나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사랑은 너무 다양해서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자기만의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한다. 내게 사랑은 휴지걸이에 걸어둔 휴지에 튄 여러 물방울과 비슷하다. 물방울 하나가 튀었을 때 휴지가 젖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러 방울이 만나면 휴지는 젖었다고 할 수 있다. 휴지에 튄 물방울들은 크기가 각각 다르고, 젖는 속도도 다르다. 물방울들이 휴지에 젖어 들어가는 시간만큼이나 짧은 순간에 나는 엄마를 사랑하게 되었다.
   마지막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용인으로 올라갔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지냈다. 엄마와 용인외대로 산책을 가고, 엄마가 좋아하는 초밥을 먹고, 동네의 파스타 집에도 갔다. 화성으로 옷을 사러 가며 친구 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 침대에 나란히 누워 언제쯤 강아지를 키우자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졸업하고 나서는 공장에 가 돈을 벌 것이라고 하자, 공장에 다녔던 경험을 바탕으로 엄마는 내게 여러 조언을 해준 적도 있었다. 엄마랑 정말 맞지 않지만—엄마는 분명 ESFJ였을 것이다. 나랑 정반대—이제 의지할 사람은 둘뿐이니까.
   나는 조금씩 엄마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분명히 엄마를 사랑해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사랑하고 나서, 휴지에 튄 물방울 자국이 조금만 더 진해지고 나서, 과거의 일들을 말하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엄마를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엄마가 내게 사과를 하지 않아도, 용서할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엄마는 죽었고, 나는 엄마를 영원히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상태로 엄마를 떠나보냈다. 사랑과 원망이 공존한 채 엄마의 영원히 떠지지 않을, 감은 눈을 보았다. 겁이 나서 주름진 손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유골함을 봉안당에 넣었다.
   미친 듯이 소설을 썼고 시를 썼다. 엄마가 죽거나, 애인의 형이 죽거나, 아무튼 인물 한 명은 무조건 죽는 소설이었다. 사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늘 누군가의 죽음을 소재로 소설을 썼으니까. 하지만 엄마가 죽은 뒤로는, 그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다. 죽음을 경험한 인물에 이입했다. 일종의 엄마를 애도하는 방식이었다. 누군가는 내게 소설을 이용해 엄마를 애도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소설과 시, 일기는 엄마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일기를 쓰면서 내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들을 써 내려가는 동안, 나는 이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약간 흐른 뒤에는 엄마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도 한 적 있다.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용인에서의 생활을 지겨워하고 엄마와의 대화가 짜증의 연속이었다면 이 정도로는 힘들지 않았을 테니까. 무의식적으로 엄마와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사랑과 관심을 간절히 원했던 과거의 나로 돌아갈 것이 뻔하니까.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엄마를 원망하는 일기를 쓰면서도 나는 바랐다. 엄마가 이 일기를 몰래 읽고 내게 미안하다고 말해주기를. 관심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앞으로는 네게 집중하겠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원망하는 감정도 그 사람에게 마음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정말 엄마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더라면, 원망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되든 나는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끔 엄마와 했던 카카오톡 대화 캡처본을 들여다본다. 이제는 방이 없어져서 캡처 몇 개뿐이지만, 그 어이없고 짧은 대화들을 읽어보면 웃음이 난다. 엄마는 내 문신이 예쁘다고 해주었다. 이모티콘 선물을 했을 때는—돈을 써서—정신 나간 가시내라고도 했었다. 나는 그 문장들, 엄마만이 가지고 있는 애정 어린 문장들을 보면 지금도 약간 울고 싶어진다. 더 많이 전화했다면, 더 많이 대화를 나누고 더 많이 찾아가고 한 번이라도 여행을 가봤다면 어땠을까 싶으면서도, 엄마가 죽지 않았을까 싶으면서도, 앞서 말한 이유 때문에 차라리 지금이 나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 대한 에세이를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수많은 사랑을 떠올렸다. 여러 개의 도입부를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모두 엎어버렸다. 그 글들에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나는 사랑을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엄마에 대한 감정만큼은 사랑이 일정 부분 담겨 있다고 확신한다. 엄마 대신 죽거나 엄마의 빚을 대신 갚아줄 정도의 사랑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를 어느 정도는 사랑했다. 그 사랑이 완전하다거나 아름답다고는 못하겠지만, 완전하지 않고도, 아름답지 않고도 사랑은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엄마에게 느낀 것처럼.
* 영화 < 데몰리션 >의 OST. 내가 좋아하는 노래이다.

Warmest Regards

김나연

2022
에세이, 29문단에 4,410자. 사랑.

김나연

광주에서 거주 중인 공통점 멤버. 요즘엔 뮤즈의 'you make me feel like it's halloween'을 즐겨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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