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시적 각주와 인생이라는 책

 
이서영

   느릿한 빙하: 데이터를 들여다보며 < 2123 >

 

   어떤 계절, 데이터셋 분류학자 A는 21세기를 개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텍스트가 시라고 주장한다. 그는 지난 역사 속의 작가 보르헤스를 인용하며, “모험적인 착상은 우리를 하여금 다시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게 한다”고 말한다. 세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효율적으로 요약하는 데이터셋은 다름 아닌 시였다고 말하기 위해 그는 이전 세기 기록의 더미로 뛰어들기로 한다.

   그는 이 사적인(어떻게 보면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될) 의지가 담긴 일기를 < 세계기록교환기구 >에 등록시키기로 한다. 그것은 무한증식 스펙트럼과도 같다. 이전 시대로 치자면, 일종의 웹-도서관을 연상하게끔 하는 전근대적인 이곳에서 기록들은 서로를 넘어뜨릴 수 없고, 서로를 불사를 수도 없다. 복잡다단한 감정은 행과 열에 맞추어 분류되어있으나, 누군가 새로운 텍스트를 등록하면 해묵은 기록은 ‘느릿한 빙하’처럼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며 길을 낸다. 길은 채널이 된다. A의 사적인 의지가 담긴 일기는 활짝 열린 채널 안으로 들어선다. 참고로 이때 채널이란 기록이 접속할 수 있는 연도를 뜻한다. < 세계기록교환기구 >는 저술에 참여해주는 인류가 남아 있는 한 무한히 증식될 수 있다. 이것은 “끝까지 완료될 수 없는 인류 공동저작물”로서, 크게 세 가지 축으로 가동된다. 첫째,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기반으로 한 기록- 둘째, 일어나지 않았으나 어쩌면 과거에 일어났을 수도 있는 사건에 대한 기록- 마지막으로 우리 앞에 내일이라도 일어날 수도 있는 미래의 사건에 대한 기록까지도.

 

 

   마코토 < 1987 >

 

   직접 꾼 “꿈 일기”를 시에 도입시키는 방식으로 유명한 시인 잇시키 마코토는 일본 러시아 문학회에서 < 러시아 미래파와 나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나는 그의 강연을 직접 듣고 돌아와 짧은 시와 칼럼을 함께 게재하기로 했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자 문득 묘연해지는 것이다. ‘나’의 내부 안에서 옛 시인들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창살이 지나치게 견고할 때―그러니까 그 어떤 문장도 쓸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 어떻게 견디나? 무엇보다 미래라는 것이 인간의 기량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인가?

 

   “마코토의 시는 일종의 연속체에 가까운 것이다.”

 

   종이 위에 첫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어쩌면 그의 언어들은 스스로 아득한 곳으로 나아가, 사라지기를 희망하는 말들인가? 아니, 이것은 오독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마코토의 시는 세상의 풍광 안에서 쉽게 닳을 성질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한껏 고양된 심신이 꿈꾸는 혁명과는 무관하기에, 가장 자유로운 곳에 놓일 수 있다.


※ 본문은 이서영 포에트리 인덱스, 『네가 이 세상의 후렴이 될 때』(유미주의, 2023)에 실린 글들을 발췌하였다.

시적 각주와 인생이라는 책

이서영

2023
산문, 7문단에 975자. 일종의 연속체에 가까운 것.

이서영

광주 출생 및 거주. 장르적 구분에 갇히지 않는 글쓰기를 지향하며 공통점과 함께한다.

instagram : @applenenenene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