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인 거 티내지 마, 유령이
사람인 거 지겹지도 않아, 사람이
비를 닮은 마음과 눈을 닮은 시선이
비가 내리는 오늘과 눈을 기다리는 내일이
너와 내가 만난 건 우연일까 너와 내가 만난 건 운명일까
우리는 분리되는 걸까 우리는 불안한 걸까
죄가 많고 법이 많은데 범인이 우리래
존재가 때로는 죄인데 범죄는 우리래
*
유령이 지나가면 유령이 범인이었다
유령이 내 안으로 들어오면
나는 도둑이었고
살인자였다
행진은 유령을 숨겨준다 일상에 숨고 그림자에 숨고 내일에 숨는다 오늘의 비가 내일은 눈으로 얼어붙는 순간처럼
우리가 된 게 하나의 우연과 다수의 운명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유령이 유령의 손을 잡고
어쩌면 손을 잡을 수 있는 건 서로 밖에 없고
기우제가 되고
여름을 기도하고 겨울을 기적이라 부르고
우리는 우리라서 우리는 우리여서
유령은 유령이어서 서로를 서로라고 부르고 이름이 미끄러지고
마주하고
공간이 될 수밖에 없고
*
너와 헤어지던 날이 너와 만나는 날이었어
이 말이 데자뷔처럼 들려, 반복은 리듬처럼 들려
너를 믿은 날이 신을 지운 날이었어
이 말이 기도처럼 들려, 기도가 이미지처럼 보여
도시에 숨고 도시가 되고 도시가 부끄러워
소리에 숨고 움직임이 되고 우리만이 살아 있어
유령이 되어서 유령으로 헤어져서 유령으로 울어서
비가 되어서 눈으로 헤어져서 햇빛으로 이해돼서
시를 벗어나지 말고, 시로 거짓말을 할지라도
사랑을 벗어나지 말고, 사랑으로 거짓말을 할지라도
페이지를 별처럼 눈처럼 거미줄처럼 넘겨낸다
이 문장을 마음처럼 세계처럼 시선처럼 넘겨낸다
*
잠깐의 축복이
잠깐의 울음으로
거리가 제법 가득했던 때도 있는데
거리가 제법 슬펐던 때도 있는데
유령이 떠나가고
유령이 돌아오고
시가 회복되고
시가 무너지고
나는 나로 돌아오는 이 반복이
나는 나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 실패가
나를 벗어나려는 벗어날 수밖에 없는
나를 적어내는 적지 않고 견딜 수 없는
네가 내리는 눈에 있다
네가 겨울에 있다
내가 아직 여름일지라도
내가 아직 빗속을 헤맬지라도
공간이 꽉 찼지만
전체로 봤을 때는 하나의 점으로
우리는 소수였다
많은 개체로 여겨질 뿐 항상 소수였다
내가 부른 게 아니고
내 옷에 달라붙은 유령들이 존재를 환기했을 뿐
창을 연 것도
바람이 분 것도
목소리가 목소리로 연결됐을 뿐이었다
우리는 목소리였다 소리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뿐 항상 목소리였다
도시 속에서 방은
이질적이고
이례적이어서
아파트를 벗어나고
우리를 웃어넘기고
자아를 무너뜨리며
산산조각 흐르며
사람들이 거리에 갇혀 있다
시선을 잃은 채
사유를 지운 채
방향이 없고
시간이 없고
손길이 없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시선처럼 부유할 뿐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들의 외부로서 연대한다
하늘이 벽처럼 단절되고
애초에 두드리는 자가 없고
사랑과 사람의 뜻을 헤매고
믿음과 인간의 격차를 실감하고
우리가 갇혀 있는 건지
그들이 갇혀 있는 건지
삶의 이면과 죽음의 이면을 헤매고
시선과 시간의 격차를 실감하고
미래와 과거가 엉킨다
현재의 죽음은 문장의 시작이다
우리는 그들과 동일해질 수 없다 구름처럼 불안으로 쏟아질 뿐 그들의 판타지로써 꿈이 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