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화일
 
김나연

   화일은 학 두 마리가 나란히 날아가는 모습을 본다. 커다랗고 하얀 것들이, 긴 날개를 펄럭이며 화일의 뒤쪽으로 날아간다. 서로 부딪히지 않을 정도로 가까우면서도 멀리,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 화일은 그것들의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그만둔다.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한다. 화일은 얼마 안 가 두 마리의 새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10월이지만 아직 화창하다. 화일은 버스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을 본다. 화일의 직장은 저수지와 붙어 있어서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퇴근할 수 있다. 화일은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을 본다. 사람들이 밟는 낙엽, 수도 없이 짓밟혀 이제는 온전한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이 섞여버린 낙엽들. 그 위를 새롭게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덮는다.

   길게 이어진 나무들을 지나면 아파트 단지가 나타난다. 화일이 타기 전부터 타고 있던 승객들은 대부분 아파트 단지에서 내린다. 창밖으로 강아지와 산책하는 중년의 여자를 본다. 강아지가 나무 앞에 서서 냄새를 맡는다. 여자는 통화를 하고 있다. 버스는 강아지와 중년의 여자를, 아파트 단지를 지나쳐 화일이 사는 곳에 정차하고, 화일은 버스에서 내린다.

   화일은 대낮의 퇴근길을 사랑한다. 아침 아홉 시 삼십 분부터 시작해 오후 한 시 삼십 분에 끝나는, 아르바이트에 가까운 직장을 사랑한다. 모든 순간을 규칙적으로 살지는 않지만 대부분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움직인다. 화일은 대략 두 시에 집에 도착한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가 외투를 벗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책상에 앉는다.

   화일은 사람들이 집에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사실 화일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시간을 낮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며 보낸다. 글을 써보기도 하지만 금방 그만둔다. 불행할 때만 글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지금처럼 평온할 때에는 글을 좀처럼 쓰지 않는다.

   퇴근 전, 화일은 사장으로부터 다음 달부터 정규직으로 전환됨을 통지받는다. 약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보여준 화일의 꼼꼼함과 침착함이 인정받은 것이다. 두 배가량 높아진 월급과 아홉 시-여섯 시 업무 시간은 화일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화일은 미소를 지으며 사장의 말을 듣는다.

   화일은 퇴근하는 버스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집에서 그것을 마주한다. 저녁을 다 먹은 뒤 개수대에 그릇들을 올려놓고 몸을 돌릴 때, 발견하고야 만다. 냉장고 옆 빈 공간에, 우두커니 서 있다는 말보다 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릴 만한 그것.

   커다란 눈이다. 눈알과 시신경만이 화일의 앞에 있다. 파이프처럼 쭉 뻗은 시신경은 허공에 떠 있고, 그 끝에 달린 눈알은 웬만한 밥솥보다 크다. 검은자위가 또렷하게 화일을 바라본다. 너무 놀라서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그때 화일은 오랜만에 공황 발작을 겪는다. 주저앉아서 숨을 헐떡이다가, 가까스로 두 손을 모아 입을 틀어막는다. 경직된 눈이 그것과 마주친다.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쉰다. 하나… 둘… 셋…

   

   화일이 우울증 환자냐고 묻느냐면 이제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과거에는 우울증 환자였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아니다. 화일은 이제 평범하다고 부를 수도 있는 삶의 범주에 올라섰다. 화일이 지금까지 부러워했던 삶이다. 정확히 어떤 삶이 평범한 삶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적어도 화일이 생각하는 평범한 삶은 직장을 고민하고, 돈 걱정을 하고, 그러니까 온전히 자신의 삶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화일은 자신이 평범한 삶을 살게 되는 것에 집착해왔다. 그것은 중학생의 화일이나 어른이 된 화일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행복한 것을 부러워하는 대신 평범한 것을 부러워했다.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조바심 냈다.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을 보게 되었으니 평범한 삶을 살기에는 글렀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화일은 우울증 환자가 아니다. 조현병 환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본 것이다.

   

   스물까지 센 뒤 마지막 떨리는 숨을 내뱉는다. 눈을 뜨기 전 화일은 저것이 환각일 것이라고,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안 좋아서… 라고 하기에 요즘엔 너무 잘 자고 너무 잘 먹지만, 어쨌든 기가 허해서라도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눈을 뜬다. 여전히 냉장고 옆에 떠 있는 그것이 보인다. 눈길을 피한다. 조심스럽게 그것과 마주치지 않도록 일어나 부엌을 빠져나온다.

   화일은 오늘 일찍 잠에 든다. 침대는 부엌 바로 옆에 있고, 부엌과 침대 사이에는 통 유리문 하나가 있어 아주 잘 보인다. 부엌에 난 창문으로 약한 달빛이 들어온다. 냉장고가 희미하게 보이고, 그리고 그 옆으로 커다란 눈도 보인다. 화일은 돌아눕는다. 울음은 나오지 않는다. 울 정도는 아니다.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내일 하자. 눈을 깜박거린다. 눈이 어둠에 익어 벽지가 보인다. 콘크리트 느낌이 나는, 진회색 벽지.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뭘 하든, 내일 하자.

   

   퇴근 후 정류장에 도착한 뒤에야 어제 보았던 두 마리의 학을 기억해낸다. 맑은 하늘은 텅 비어 있다. 흔하게 보이던 구름 한 점도 없다. 가을 하늘이구나,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하늘이 화일을 묘하게 만든다. 무언가 빠져나간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긴장한다. 이 기분은 옛날에 자주 느끼던 기분이다. 주변을 둘러본다. 정류장 벤치에는 나이 든 남자 한 명이 앉아 있다. 벤치 끄트머리에 앉아 남자가 신경 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숨을 몰아쉰다.

   치밀한 노력 덕에 남자는 화일 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때마침 온 버스에 올라탄다. 맨 뒷자리에 앉은 화일은 불안한 낌새를 느낀다. 이 불안감. 불시에 덮쳐오는, 긴장하고 있어도 계속해서 밀려오는 불안으로 인해 더더욱 급격히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오랫동안 느낀다. 일 년간 느끼지 않아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화일은 창문에 기대 바깥을 내다본다. 어제도, 그제도 보았던 낙엽과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다 그대로인데 자신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눈을 내리깐다. 화일이 탄 버스가 그 근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감시당하는 것 같다. 옷을 갈아입으며 생각한다. 그것은 아직도 냉장고 옆에 떠 있다. 이 주가 지났음에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크기의 검은자위가 화일을 좇는다. 고개를 크게 젓는다. 시선은 여전히 화일에게로 향하고,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갈 곳이 없으므로 집을 나설 수도 없다. 화일은 그 전화로 인해, 그 눈으로 인해 매일매일 과거로 돌아간다. 그들은 화일의 양팔을 잡고 과거로 끌고 간다. 화일은 끌려간다.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화일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거로 끌려가도, 현실로 빠져나와도 지옥 같은 것은 매한가지이다.

   숨이 막히는 것 같다. 화일은 옷가지들을 빨래 바구니에 던지듯 놓고 거실로 나온다. 좁은 거실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향한다. 의자 위로 올라가 쪼그리듯 앉는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얼마 안 가 호흡이 가빠져 손을 모아 입을 틀어막는다. 눈을 질끈 감는다.

   그래도 지금이 나아… 하나밖에 없으니까. 숨을 헐떡이며 작게 중얼거린다.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져서,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되어간다. 이마를 짚는다. 점점이 맺힌 식은땀을 쓸어내리고 얇은 공책 한 권과 펜 한 자루를 꺼낸다. 공책은 두세 줄의 짧은 글로 가득하다. 화일은 자신이 어떤 이유로 이 글을 썼는지 알지 못한다. 맥락도 의미도 없는 짧은 문장들. 빈 곳에 펜촉을 가져다 댄다. 꾹 누르자 잉크가 살짝 배어 나온다.

   겨우 한 문장을 적는 데 십 분이 걸린다. 마침표를 찍은 뒤 공책을 덮는다. 연필꽂이에 펜을 꽂고, 공책을 옆으로 밀어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난다. 의자에 대충 걸어놓은 외투를 입는다.

   갈 곳은 없다. 그럼에도 무작정 걸음을 옮긴다. 옮길 수밖에 없다. 정처 없이 걷던 화일은 작은 공원으로 들어가 벤치에 앉는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느껴지는 시선도 없다. 깊은 한숨을 내쉰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쬔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간헐적으로 부는 바람은 약간 쌀쌀하지만 견딜 수 있는 정도다.

   화일은 멍하니 정면을 본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작은 놀이터가 있다. 초등학생 네다섯 명이면 꽉 찰 정도로 작은 놀이터다. 미끄럼틀에는 누군가 두고 간 빨간색 띠가 있다. 태권도장에서 사용하는 띠. 바람이 불면 가볍게 흩날리다가, 바람이 멈추면 조금씩 잦아든다. 화일은 한참 뒤에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몇 번 가다가 저음의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 화일은 울음을 애써 참으며 말한다. 도와줘. 나 좀… 도와줘. 남자는 어디냐고 물어본 후 전화를 끊는다.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울기 시작한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눈물을 닦아내면 시야가 잠시 깨끗해졌다가 다시 흐려진다.

   이를 악문다. 왜, 왜 내가 그것 때문에 울어야 하지. 화일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화일의 울음은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슬픔보다는 분노에 가깝다. 어쩌면 두려움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두 손으로 눈을 비빈다.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눈물을 더 이상 흘리고 싶지 않다.

   키 크고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화일을 부축해 일으킨다. 그는 화일을 차에 태운다. 화일은 창밖을 바라보며, 집에 가기는 싫어, 말한다. 남자는 화일을 힐끔 바라본다. 화일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으로 향해 있고 번갈아 나타나는 낡은 간판과 새 간판을 본다. 빛이 바랜 간판. 만든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 간판. 남자는 좌회전 지시등을 끄고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린다.

   줄지어 심어진 가로수들이 빠르게 지나친다. 화일은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생각한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을까. 자동차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선다. 눈을 감는다.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속으로 중얼거린다.

   

   가만히 있어.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지. 나는 그녀와 그녀의 모든 것을 경멸했다. 경멸하지 않으면 내가 경멸당할 거야.

   

   그의 집은 깔끔하다. 집안에 물건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실은 꽤 넓지만 텔레비전도, 소파도 없다. 바닥에 앉아서 먹는 테이블 하나가 끝이다. 썰렁한 공간이지만 화일은 이곳에서 한기를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다. 그의 벽면을 가득 채운 액자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수많은 사진. 그가 여행을 다니며 직접 찍은 것이라 했다. 벽 반쪽을 거의 다 채우는 거대한 바다 사진부터, 아주 작은 꽃을 찍은 사진까지 종류는 다양하다. 그러나 사람 사진은 단 하나도 없다. 화일은 새롭게 들어온 액자를 쓸어 만진다.

   여기는 어디야?

   제주도. 요즘엔 바빠서.

   화일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본다. 안개가 잔뜩 껴 있지만 그 너머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 저번에 학을 봤어.

   학?

   응. 한… 이 주 됐나?

   그는 고개를 갸웃한다. 잠시 바깥을 바라보다가, 달력 앞으로 가 날짜를 확인한다. 화일은 우두커니 서서 그의 행동을 바라본다. 부엌으로 가 물에 컵을 따르는 뒷모습을 본다.

   맨 처음 만났을 때. 그때도 그는 화일에게서 등을 진 채 쪼그려 있었다. 두 사람은 동네 구석의 A 공원에서 약속을 잡았다. 화일은 10분 일찍 도착했고 그는 20분 더 일찍 도착했다고 했다. 그는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다가 화일이 다가가 어깨를 툭툭 치고 난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약간 말랐고, 머리는 길게 자라 덥수룩했으며, 다 해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사진 찍기로 한 분이세요? 그가 물었고 화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화일을 인적이 드문 수풀로 이끌었다. 제가 완전 아마추어라 이해해주세요. 사람은 처음 찍어봐서. 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화일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처음 찍혀보는 거라.

   그때는 네가 이렇게 잘 찍는 사람인지 몰랐지.

   사람은 찍어본 적 없다니까.

   그거랑 비슷하지 않나?

   과거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카메라에 관심 없는 화일이 봐도 꽤 비싸 보이는 카메라를 든 그는 떨고 있는 듯했다. 수시로 바지에 땀을 닦아댔다. 화일은 괜히 그에게 관심이 갔다.

   달라.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그런데 정말 학을 봤어?

   응. 다리 길고 하얗고… 학이잖아.

   아니, 지금 계절은 학이 나타날 때가 아니라서.

   그에게 뻗은 손이 멈춘다. 그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화일을 바라본다. 화일은 침착하게, 그가 이 순간을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노력하며 컵을 받아 든다. 몸을 돌려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고 앉는다. 그는 맞은편에 앉는 대신 화일을 지나쳐 액자를 정돈한다.

   화일은 이곳에 있으면 왠지 모를 안정감을 느낀다. 그가 찍은 모든 것을 본다. 고요한 바다, 나무, 산, 멈춘 기차 같은 것들.

   전화를 받았어. 화일은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한다. 시선은 테이블에 새겨진 무늬로 향해 있다. 불규칙적으로 새겨진 무늬들. 사각형, 원, 삼각형, 반원이 서로 뒤섞여 어지럽다. 정제된 그의 집에서 유일하게 시끄럽고 불안정한 물건이다. 뭐라고? 그가 몸을 돌린다. 멍하니 그와 눈을 마주치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냐, 아무것도.

   화일은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냉장고로 시선을 돌린다. 그것은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으로, 작은 불안과 의심이 화일의 시선을 그곳으로 이끈다. 화일의 작은 냉장고와 비슷한 디자인의 냉장고 주변은 깨끗하다. 남자가 다가와 화일의 맞은편에 앉는다. 그에게서는 나무 향이 난다. 잠이 들 만큼 부드럽고 온건하다. 그가 건넨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연다.

   

   잠깐 만났던 애가 있어. 너처럼 사진 찍는 걸 좋아하던 애였는데. 걔가 어느 날은 새를 찍고 아쉬워하는 거야. 너무 흐리게 보인다고. 날아가는 새를 어떻게 사진으로 찍겠어. 내가 봐도 확실히, 새인가, 싶게 생기긴 했어.

   있잖아. 그 애는 분명히 새를 찍었어. 그런데 새가 너무 빨라서 제대로 나오지 않게 되면, 그래서 그걸 제삼자인 네가 본다면 그걸 새라고 생각할까?

   

   화일은 방문을 닫는다. 오늘도 여전히 달빛은 밝다. 여전히, 그 눈이 있다. 풍선처럼 떠 있는 그것을 바라본다. 서로 오랫동안 마주하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연다. 너는 도대체 뭐니, 말을 건다. 그것은 대답하지 않는다.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올려다본다. 눈은 고개를 숙인 것처럼 검은자위를 아래로 내려 화일을 내려다본다. 화일은 다시 오랫동안 그것을 본다.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을 연다. 먼지 묻은 종이컵을 꺼내 바닥에 두고, 남자가 준 담배를 피운다. 매캐한 연기를 그것에게 뱉는다. 그것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주 커다란 민들레 홀씨 같다. 화일은 생각한다. 바람이 불면 뿔뿔이 흩어져 날아갈 것 같다.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재를 종이컵에 대고 턴다. 다시 연기를 그것에게 뿜는다. 옅은 바람이 불었을 텐데 그것은 뿔뿔이 흩어지지 않는다. 날아가지도 않는다.

   네가 처음 나타났을 때, 전화 한 통이 왔었어.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화일은 중얼거린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어. 미안하대. 몇 년 만에 온 전화인데 그게 끝이야.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어.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끊었어. 언제 보자, 이런 얘기도 없어. 그냥, 그냥 그게 끝…

   숨을 몰아쉰다. 눈은 여전히 화일을 바라보고 있다. 화일은 담배를 종이컵에 넣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난… 나는, 나는 도대체 뭘 기대한 걸까? 그 사람이 미웠지만, 보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있었어. 하지만 내가 거기서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사과만 하는 사람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화일은 눈물을 닦아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 단어, 미안하다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린다.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는 다짜고짜 미안하다고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화일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물었고, 뒤이어 상대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을 때, 화일의 머릿속은 불투명해졌다. 상대가 내뱉는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자음과 모음으로 나뉘었다. 화일이 퇴근길에 보던 낙엽처럼 바스라지고 뒤섞였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밟는 것은 당연하다. 바닥을 가득 채운 낙엽을 밟지 않고 피할 수는 없다. 화일은 그 낙엽을 밟는다. 자신의 발밑에서 조각조각 바스러지는 낙엽을 바라보며처음에는 불안을, 그다음으로는 쾌감을 느낀다.

   

   저수지 옆 산책로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챙 달린 모자를 쓴 채 걸음을 옮긴다. 간혹 뛰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대부분 중년이고, 젊은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시선을 산책로 너머로 옮긴다. 신호등 신호가 길어 화일의 시선은 당분간 멈추어 있다. 거기 어둠이 아직 걷히지 않은 저수지를 바라본다.

   저수지는 꽤 깊어 보이고, 색이 짙다. 몇 달 내내 봤으나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준다.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저수지 옆을 걷는 자신을 상상한다. 지나치는 사람들과 그들이 밟고 가는 낙엽을 바라보는. 화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저수지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는다. 그저 지금처럼, 저수지 옆을 지나가며 나무와 저수지와 작게 느껴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그녀는 숨을 참는 사람이지. 자기가 숨을 참는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아.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로 숨을 참아. 그렇게 심하지는 않은 것 같아. 아직까지 죽지 않은 걸 보면. 나는 그녀가 영원히 숨을 참았으면 좋겠는데.

   

   꿈을 꾼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집을 나서는 꿈. 아무도 없는 곳,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을 걷는다. 바닥이 어두워 하늘을 걷는지 땅을 걷는지도 알아차릴 수 없을 때 그들을 만난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화일만을 바라보는, 화일이 그들의 눈빛에 녹아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에게 화일은 잔뜩 구겨진 종이가 되고, 이사할 때 두고 간 가구가 되고, 한데 모아 버려진 닭 뼈가 된다. 몸을 움찔한다.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음에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매일 같은 꿈을 꾸는데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손에 잡혀 그대로 서 있어야 한다. 그들이 앞으로 다가와 바람을 후 불고 소리를 질러대도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화일은 오히려 꿈에서 깨어난 뒤 안정을 되찾는다.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덕분이다. 조용한 집, 화일 말고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화일만의 성. 부엌으로 눈길을 준다. 고해성사 비슷한 것을 한 뒤로는 그것 자체로는 무섭지 않다. 다른 수많은 복잡한 감정이 들 뿐이다.

   그것을 지나쳐 화장실로 향한다. 휴일이지만 그와 약속이 있다. 칫솔에 치약을 바르고 입안에 넣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본다. 거품이 묻은 입술과 약간의 여드름 흉터가 있는 뺨을 바라보다가, 눈을 마주친다. 오로지 화일을 따라붙는 시선. 검은 눈동자를 본다. 거울에 비친 나도 내 눈을 보겠지. 거울 속 화일의 눈을 보면 상대도 자신의 눈을 본다. 눈길을 돌리면 상대도 눈길을 돌린다. 세면대에 손을 짚은 채 거울을 빤히 들여다본다. 정확하게는 자신의 눈을 들여다본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건너편의 눈이 다른 곳을 보기를 기다리며.

   

   화일은 그의 차에 올라탄다. 피곤해 보이네. 사진 찍을 수 있겠어? 그가 화일의 겉옷을 뒷좌석에 두며 묻는다. 화일은 고개를 끄덕인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자동차는 유연하고 매끄럽게 좁은 도로를 벗어나 넓은 도로로 빠져나온다.

   카메라 렌즈가 화일을 본다. 화일 역시 카메라 렌즈를 본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화일은 떠올린다. 카메라 렌즈는 화일의 눈보다 조금 더 까맣고 훨씬 더 크다. 차라리 냉장고 옆 그것처럼… 숨을 들이켠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다시 자세를 취하고 찍히는 것에 집중한다.

   고해성사를 한 이후로 화일은 그것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비밀을 털어놓은 친구를 멀리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친구를 보면 자신이 털어놓았던 비밀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처럼, 그것을 마주하면 그동안 겪었던 모든 일이 떠오를 것 같았다. 저녁 식사는 대부분 밖에서 해결했고, 침대 위로 올라가면 바로 벽을 보고 누웠다. 냉장고 왼쪽에 세탁기가 있어 빨래를 할 때에는 아예 냉장고를 등졌다.

   화일도 알고 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눈을 한 번 감고 뜨는데 카메라 렌즈가 한 발자국 다가온 것처럼 더 크게 느껴진다. 다른 자세를 취한다. 카메라는 화일의 얼굴과 눈이 아닌 화일 전체를 바라보고 있다. 자세를 취하는 척하며 약간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카메라의 초점이 약간 바뀐다. 스스로 움직인 게 아니야.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 상황에 익숙해지는 게 목적이잖아. 눈을 질끈 감는다. 집중하려 했음에도 그 노력으로 인해 오히려 집중력이 완전히 깨진다.

    그가 다가와 화일의 자세를 조정해준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좀 쉴까? 그는 화일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준다. 화일은 그대로 주저앉는다. 미안…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약하게 숨을 헐떡이며 사과한다. 오늘은 이쯤 하고 집으로 가자. 내가 밥 해줄게. 그는 화일을 부축해 일으킨 뒤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화일은 벽에 기댄 채 카메라를 바라본다. 카메라 렌즈 위로 덮개가 씌워진다.

   

   그가 냉장고를 열고 화일은 그 안을 본다. 말라비틀어진 사과 한 알이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그의 집과 말라비틀어진 사과는 어울리지 않다. 천천히 닫히는 냉장고 문틈 사이로 보이는 사과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그녀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어. 나 역시 그렇지.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지만, 결국 죽는 존재라는 사실은 같아. 그리고 나는 그것마저도 치욕스러워.

   H는 눈을 뜬다. 그리고 감는다. 뜬다. 감는다. 주먹을 쥐었다가 푼다. 잠시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그녀를 죽여버릴 것 같아. 나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해. 생각만으로는 부족해. 그녀가 계속 떠올라. 계속해서, 나를 잠식하는 것처럼, 그녀가 계속…

   

   그의 차에서 내린다. 그는 차창을 열고 손을 흔든다. 화일 역시 손을 흔들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에 타는 순간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벅차오르는데,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다. 심장 부근을 조심스럽게 누른다.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 천천히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본다.

   길고 조용한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생각한다. 그는 화일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사진을 찍어보자고 연락을 해온 쪽도 그였다. 사진을 찍어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가 제안했고 화일은 받아들였다. 화일의 첫 사진을 찍어준 사람도 그였으니까. 화일은 문 앞에 선다. 레버형 손잡이는 차가워 보인다. 복도의 조명이 시간이 지나자 하나하나 꺼진다. 환하던 복도는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조심스럽게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문을 연다. 문손잡이가 차갑고 단단하다.

   그것은 여전히 있다. 주방에, 냉장고 옆에 그대로 떠 있다. 화일은 그것을 애써 무시하기로 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격렬한 감정이 거칠게 달려들 것이 분명하다. 눈을 내리깐 채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다시 옷을 입는다. 침대 위로 올라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정규직으로 일하니 괜찮을 것이다. 집에 오면 바로 뻗게 되겠지. 옛날 생각이든 저것이든, 금방 잊게 될 거야. 저녁 식사를 밖에서 하고 들어오는 것도 부담이 덜하겠지.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

   

   깨끗하게 치워진 땅을 바라본다. 해가 뜬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적어졌고, 낙엽 가득한 땅은 얼어붙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김을 내뿜는다. 목도리를 하고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었는데도 몸이 으슬으슬하다. 낙엽은 이제 없다. 그날 이후로 전화도 오지 않고, 여전히 눈은 있지만, 이제 그 눈마저도 익숙해 아무렇지 않다.

   저수지는 더욱더 어두워져 잘 보이지 않는다. 산책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퇴근하는 차량이 가득해 주변 시야가 빨갛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량을 본다. 출근길과 비슷한 풍경이다. 나뭇가지에 나뭇잎은 없고, 사람들은 패딩 점퍼로 온몸을 감싼 채 거리를 걷는다. 화일은 갑작스레 몸서리를 친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친 화일은 재빨리 침대 안으로 파고든다. 이불을 덮고 천장을 바라본다.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한 곳을 뚫어지게 본다. 그리고 시선을 주방 쪽으로 돌린다.

   그 행동은 충동에 가깝다.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화일은 그날 이후로 눈을 똑바로 본 적 없다. 존재가 익숙해진 것이지, 감정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화일은 눈을 본다. 커다란 눈을 본다. 파이프처럼 뻗은 시신경과 또렷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자위. 숨을 참는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평범한 삶의 범주에 오르기 위해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고 많아진 업무를 처리하느라 잊고 있었던 현실을 깨달아버린다.

   아니, 화일은 헷갈리기 시작한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지. 저 눈은 환각이 분명하니 현실이 아닌가? 적어도 화일에게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쪽이 현실에 가깝다. 자신이 애써 외면하던 현실을 마주한 것이다. 평범한 삶이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벽지를 향해 눕는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한다. 아스팔트 같은 벽지. 몇 주 전 낮에 보았던 낙엽을 떠올린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밟던 낙엽과, 하늘을 가로지르며 화일의 뒤편으로 날아가던 새를 떠올린다. 기억들은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섞인다. 그리고 그 위로, 그에게 해주었던 말이 떠오른다.

   

   나는 되게 바보 같다고 했지. 동영상으로 찍어서 캡처하면 되잖아. 근데 걔는, 보이는 걸 그대로 찍고 싶어 했어. 멈추지 않는 걸 멈추고 싶다면서. 사진으로 찍는다고 해서 멈추는 게 아닌데.

   

   화일은 울기 시작한다. 밀려드는 수많은 감정을 전부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받아내야 한다. 그것은 온전히 화일이 감당해야 할 문제이다. 눈을 봐버린 이상 영원히 움직이는 쳇바퀴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찾아 그에게 전화를 건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는 화일의 보호자가 아니다. 화일의 속사정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화일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에게 전화를 건다.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을 그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그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통화 버튼을 누른다. 쉬지 않고 운 탓에 진이 다 빠지고 베개가 축축해진다. 화일은 몸을 떤다. 갑작스러운 한기가 화일의 몸 위로 조금씩 올라온다.

   

   학들은 어디로 갔을까. 버스를 타며 상상한다.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던 두 마리의 새들. 아주 먼 곳, 화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먼 곳이 목적지일 것이다. 차창에 머리를 기댄다. 나도 먼 곳에 가고 싶다. 앞에 앉은 사람들의 뒤통수를 바라본다. 이곳에 화일과 목적지가 같은 사람은 없다. 화일과 완전히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없다. 다들 나름의 고충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고충을 간직한 채 평범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들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겠지.

   화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자신이 한 일들을 그들이 인정해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인정으로 인해 자신 역시 타인과 같은 평범한 삶에 스며들었다는 것이 화일을 들뜨게 만든다.

   그리고 화일에게 전화 한 통이 온다. 화일과 전화번호 뒷자리 네 개가 같지만 낯선 번호다.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동시에, 화일의 집에 그것이 자라난다.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처럼 시신경 끝부분이 생긴다.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것처럼 흰자위 위로 검은자위가 자라난다.

   

   눈은 화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보일 정도로 몸을 떨며 울고 있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화일이 날아가는 학들을, 바스라진 낙엽들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화일을 바라본다.

   화일은 핸드폰을 힘없이 떨어트린다. 침대 사이로 들어간 핸드폰은 울리기 시작한다. 우웅, 우웅, 우웅… 화일은 그것을 꺼낼 기력이 없다. 아스팔트 같은 벽지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한기가 아주 천천히, 물이 나무에 스며들어 죽이는 것처럼 몸에 스며든다. 입술이 보라색으로 변하고 두 뺨이 점점 창백해진다.

   이대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화일은 알고 있다. 심장은 멈출 기미 없이 세차게 뛰고 있다. 꼭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뿐, 막상 해가 뜨면 침대에서 나와 출근 준비를 하리라는 사실을 안다. 동시에 화일은 깨닫는다. 자신이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한순간에 다가오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빨라지는 속도로, 손톱이 자라는 시간보다 약간 더 빠른 속도로 죽음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까무룩 잠들고, 떨리던 몸도 점점 잦아든다. 핸드폰은 어느 순간부터 조용하다. 눈은 그저 그 자리에 떠 있는 채로 화일을 지켜볼 뿐이다.

   ‘전에 만났던 사람’ 같은 건 없다는 걸, 그는 알까?


화일

김나연

2023
소설, 96문단에 10,550자. 화일은 본다, 바라본다, 마주 본다.

김나연

광주에서 소설과 시를 쓰고 있다. 최근 관심사는 기초 체력 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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