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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건이 많은 집에서는 오래된 냄새가 났다. 나는 오래된 냄새는 싫지만 그 냄새가 오래된 물건에서 나는 냄새라고 생각하면 덜 싫다. 오래된 물건에서 오래된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하고, 오래된 물건에서 오래된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싫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된 찬장에서 오래된 도시락 통을 꺼내 식탁에 펼쳤다. 도시락 통에는 수박과 복숭아를 썰어 담았다. 수박과 복숭아가 담긴 도시락 통을 보냉가방에 넣고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안심리에 있는 안심제에 갔다. 나는 요즘 안심제에서 계단을 만들고 있다. 계단은 사다리 형태로 수영장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스테인리스 소재로 만든다. 계단에 사용될 스테인리스 조각들은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안심리에 있는 안심제로 배달된다. 내가 이곳으로 배달이 오도록 해두었다. 트럭에 싣고 올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어 모자랄 때마다 추가 주문을 넣어두는데 스테인리스 공장 사장인 박수철은 올 때마다 불평을 늘어놓았다. 여기까지 배달을 온다는 사람이 있는 줄 아느냐고. 아무도 없어서 내가 직접 올 수밖에 없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도시락 통을 열어 그날 싸온 음식 중 하나를 집어 잽싸게 박수철의 입속에 집어넣는다. 그러면 박수철은 그 음식을 우물우물 씹으며 도대체 뭘 하는 짓이냐고.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이게 다 얼마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트럭 속으로 박수철의 등을 떠민다. 지금도 며칠 전 박수철이 와서 쌓아둔 스테인리스 조각들이 안심제 옆에 수북이 쌓여 있다. 행여나 군청에 들키지 않기 위해 주변의 풀들을 모조리 끌어와 덮어두었다. 나는 쌓인 스테인리스 조각들 옆에 앉아서 그걸 조금씩 연결하고 있다. 이걸 안심제 바닥에 닿을 만큼 길게 만들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다. 중간에 끊긴다고 해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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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한 장이 생겼다. 그 포스트잇은 내가 가진 포스트잇들 중 가장 컸다. 메모는 짧은데 종이는 커서 종이접기를 해도 되겠다 싶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인터넷에 상자접기를 검색했다. 상자를 접기 위해서는 정사각형 종이가 필요함. 내가 가진 포스트잇은 직사각형임. 그래서 끝부분을 조금 잘라 정사각형에 가깝게 만들었다. 자르고 남은 조각은 쓰레기가 됐다. 나는 이 쓰레기를 완성한 쓰레기통에 첫 번째로 넣고 싶었다. 원래 함께 있었던 건 함께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쓰레기통은 작아서 금방 완성됐다. 그런데 완성된 작은 쓰레기통은 내 생각보다도 작아서 아주 작은 쓰레기밖에 넣을 수 없었다. 난 애초에 아주 작은 쓰레기를 넣으려고 만든 거라 괜찮았지만 첫 번째로 넣고 싶었던, 포스트잇 자르고 남은 조각은 넣을 수 없었다. 자르고 남은 조각은, 작은 쓰레기는 될 수 있었지만 아주 작은 쓰레기는 될 수 없었다. 나는 그걸 책상 한쪽에 놔뒀다가 큰 쓰레기통에 버렸다. 내가 만든 작은 쓰레기통에는 스프링노트에서 종이를 뜯다가 나온 아주 작은 종잇조각과 입고 있던 셔츠에서 잘라낸 실밥을 버렸다. 작은 쓰레기통을 만든 이후 나는 거기에 아주 작은 쓰레기만 버렸고, 그래서 작은 쓰레기통은 전혀 가득 차지 않았고, 한 번도 비워진 적 없다. 나는 이 작은 쓰레기통이 가득 차면 비워낼 것이다. 더 큰 쓰레기통으로 가 작은 쓰레기통에 담긴 아주 작은 쓰레기들을 와르르 쏟아낼 것이다. 버리고 나면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해도 가득 찬 작은 쓰레기통을 비워낼 것이다. 실밥과 작은 종잇조각들. 실밥을 잘라냈던 셔츠는 이제 나에게 없다. 어울리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다.
나는 그 셔츠를 입고 나무가 많은 길을 산책한 적이 있다. 나무가 많은 길을 산책하면 나뭇잎과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새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갈 때는 나뭇잎과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더 잘 들렸다. 아니면 나무에 앉아 있던 새가 갑자기 날아오를 때, 그럴 때는 나뭇잎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작은 새가 날아가는 줄 알았던 적도 있다. 땅만 보고 걸어가다가 땅에 지는 새의 그림자를 보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줄 알았던 적도 있다. 까마귀가 까악거리며 우는 소리가 삐걱대는 나무 벤치 소리인 줄 알았던 적도 있다. 나를 둘러싸고 펼쳐진 나무 냄새가 너무 좋아서 입을 벌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다가 솜털 같은 꽃씨가 입에 들어간 적도 있다. 그때는 뒤를 돌아 끊임없이 펼쳐진 숲을 보며 바닥에 솜털을 뱉었다. 입에 솜털이 들어간 날 이후로 나는 나무가 많은 길을 산책할 때 꼭 모자를 썼다. 그날 머리에 새똥을 맞았기 때문이다. 새똥을 맞은 일은 새똥을 맞은 일이지만 맞은 새똥을 닦는 일은 그냥 새똥을 닦는 일이 아니다. 머리에 묻은 새똥을 닦는 일은 맨손으로는 할 수 없고 내 주머니에는 휴지도 손수건도 없어서 길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다 대충 닦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나뭇잎, 새가 날아다니며 떨어뜨린 것이고 새는 똥도 나뭇잎도 떨어뜨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새를 미워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어리둥절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모자를 쓴다. 모자를 쓴 뒤로는 새똥을 맞은 적은 아직 없다. 아니면 아주 작은 새똥을 맞았는데 모자를 쓰고 있어서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주 작은 새똥은 자연스럽게 모자에 스며들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모자를 쓴 뒤로 나는 다시 나뭇잎과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를 마음껏 좋아하면서 산책을 할 수 있게 됐다. 나뭇잎과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는 아름답다. 갈대와 갈대가 부딪치는 소리도 아름답다. 머리카락과 머리카락이 부딪치는 느낌도 좋다. 바람과 바람이 부딪치는 소리도 아름답다. 물과 물이 부딪치는 소리도 아름답다. 개미와 개미가 마주쳤을 때는 부딪치지 않고 비켜준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소리도 아름다울까. 자동차와 자동차가 부딪치는 소리도 그럴까. 문과 문이 부딪치는 소리도 그럴까. 사람과 물이 부딪치는 소리도 그럴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과 개구리가 부딪치는 소리는 알고 있다. 내 어깨 위로 개구리가 떨어졌을 때 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마구 털었다. 커다란 벌레인 줄 알고 몸서리를 쳤었다. 그런데 그게 개구리였다는 걸 알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벌레는 싫고 개구리는 좋다. 왜냐하면 벌레는 나쁜 거라고 배웠으니까. 개구리는 양서류라고 배웠다. 물 안에서도 살고 물 밖에서도 사는 거라고 배웠다. 예전에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며 개구리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들은 개구리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개구리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양서류구나 했다. 그 뒤로 나는 개구리가 어깨 위에 떨어져도 놀라지 말자고 결심했다. 마침내 내 어깨 위로 개구리가 떨어졌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나는 그게 개구리가 아니라 커다란 벌레인 줄 알았던 거고, 그래서 깜짝 놀랐던 건데 그게 개구리였다는 걸 알자마자 진정이 됐다. 어쨌든 결심은 무너졌다. 개구리가 내 어깨 위에 떨어졌고 난 깜짝 놀랐으니까. 그래서 결심을 하나 더 했다. 벌레가 내 어깨 위로 떨어져도 놀라지 않겠다. 아무리 큰 벌레여도 놀라지 않겠다. 그러면 개구리가 내 어깨 위로 떨어졌을 때 벌레인 줄 알고 놀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벌레가 떨어져도 놀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난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집에서 싸온 참외와 커피를 번갈아 먹었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오늘의 사건 사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북 울릉군 서면에 통구미 거북바위가 무너지고 충남 보령시 천북면 돼지농장에서 불이나 돼지 300마리가 죽었다. 내가 돼지였다면 나도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돼지가 아니고, 여기는 충남 보령시 천북면도 아니라 참외와 커피를 번갈아 먹었다. 참외를 씹다가 돼지가 300마리나 죽었다는데 슬퍼하지도 않고 참외와 커피를 번갈아 먹는 건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서 포크와 잔을 손에서 놨다. 슬퍼지지는 않았다. 씹어도 씹어도 입에서 사라지지 않는 참외씨 하나를 뱉어 작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시간이 지나도 슬퍼지지는 않았다. 조각가 윤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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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에 있던 하트모양 큐빅이 떨어져 나갔다. 까만색 큐빅이었는데, 까만색이 아니었다면 아마 떨어진 줄도 몰랐을 것이다. 까만색 큐빅이 떨어져 나간 목걸이는 그것대로 괜찮아서 그냥 뒀다. 큐빅은 언제 떨어져 나갔을까. 큐빅은 너무 작아서 떨어지는 소리가 안 들렸다. 들렸다면, 들렸어도 너무 작아서 못 찾았을 것이다. 찾았다면, 찾았다면 내 방 책상 서랍 속에서 오초본드를 꺼내 붙였겠지. 그랬을 것이다. 분명. 원래 함께 있었던 건 함께 있는 게 좋다. 그러나 큐빅은 떨어졌고, 큐빅은 사라졌고, 큐빅의 행방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됐다. 여자처럼. 여자는 사라졌다.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건 아주 나중에 알았다. 여자가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여자를 찾을 수 있었을까. 나는 한번도 물에 빠진 여자를 구해본 적 없고, 수영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여자가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들었어도 여자를 구하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고는 할 수 있었겠지. 나에게는 핸드폰이 있다. 여자가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래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신고를 했다면, 여자를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 지난 일이다.
그런데, 여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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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 작업실에 갔을 때 윤은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앉아 있다가 옆에 있던 영실 씨에게 이만 집에 가라고 했다. 영실 씨는 집에 갔다. 나는 방금까지 영실 씨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의자를 끌어다가 윤의 옆으로 갔다. 윤은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윤은 언제나 뭔가를 만들고 있었는데 도무지 뭘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다 완성한 것을 봐도 도무지 뭘 만든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윤이 뭔가를 만든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윤이 뭘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뭔가를 만드는 윤을 보는 걸 좋아했다. 처음에는 재료를 많이 깎았다가 점점 조금씩 깎았다. 나는 윤이 재료를 얼마만큼씩 깎는지 보며 완성을 가늠했다. 나는 완성되기 직전의 윤의 작업을 가장 좋아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깎는 시늉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깎는 시늉이 윤에게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니, 내가 보기에는 깎는 시늉이 윤에게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니, 하면서 윤의 마지막 작업을 보는 게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윤은 커다란 조각칼로 재료를 푹푹 깎아내고 있었다. 나는 윤의 옆에서 가만히 그걸 지켜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이 말라 영실 씨가 마시다 만 물만 세 모금 마셨다. 윤의 작업실은 물건이 엄청나게 많았고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이 분류되어 있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도 많았다. 처음 윤의 작업실에 갔을 때 나는 윤에게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의 용도를 물어봤었는데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물건의 이름이 나와야 했고 나는 그 물건의 이름을 들어도 용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의 용도를 물어보면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만 다시 하나가 생겼다. 처음에는 흥미로웠으나 나중에는 흥미롭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물건들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무엇인지 몰라도 수많은 그 물건들 사이에 파묻히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고 그 사이에 앉아 가만히 있는 시간을 즐길 뿐이었다. 그러나 윤의 작업실에는 물건만 많은 게 아니었다. 윤은 작업을 할 때 숨을 진짜 많이 쉬었다. 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산화탄소, 열기,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것들, 그런 것들도 확실히 많았다. 작업실은 더웠고 나는 윤이 작업에 너무나도 열중하고 있어서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윤의 옆에 앉아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윤의 옆이라서 더 더운 것 같아 윤이 눈치채지 못 하게 조금씩 멀어졌다. 다행히 의자에는 바퀴가 달려있었고 나는 발을 아주 조금씩 게걸음질하며 1센티씩, 아니면 2센티씩 멀어졌다. 아주 조금씩 움직여야 하는 게 많이 움직이는 것보다 때로는 더 많은 에너지가 들었다. 나는 더워서 윤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것인데 멀어지려고 하면서 더 더워지고 말았다. 어쨌든 윤과 나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생겼고, 나는 윤의 작업을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봤다. 창밖으로는 무성한 풀과 나무가 보였다. 나무를 타고 나뭇잎처럼 생긴 벌레가 기어갔다. 풀 사이로 아주 작은 벌레들이 뛰어다녔다. 뛰어다니는 벌레들은 메뚜기도 여치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작은 것들이었는데 너무 작아서 날파리 같았다. 그런데 날지는 않고 뛰어만 다녔다. 뛸 줄 아는 애들은 뛰어다니고 날 줄 아는 애들은 날아다녔다. 뛸 줄 아는 애들을 억지로 날게 하지도 않았고 날 줄 아는 애들을 억지로 기어 다니게 하지도 않았다.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윤의 작업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됐다. 나는 작업실 밖으로 나가 허리를 쭉 폈다. 윤에게 말하고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윤의 작업실 문은 열고 닫을 때마다 큰 소리로 끼익거렸기 때문에 아마도 윤은 내가 나간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윤의 작업실이 있는 동네를 산책했다. 나는 이 동네를 백번도 넘게 산책했다. 길이라면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골목골목을 꿰고 있었고 싫어하는 골목과 좋아하는 골목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골목에는 자전거 보관대가 있었다. 그 자전거 보관대는 스무 대 정도의 자전거를 보관할 수 있었는데 언제나 열 대 정도의 자전거가 자전거 보관대에 묶여 있었다. 비가 쏟아지던 날 나는 이 자전거 보관대에서 비를 피한 적이 있다. 자전거 보관대의 기둥과 천장 사이에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나는 거미가 거미줄을 다 칠 때까지 거미줄을 치는 거미를 봤다. 그 사이 비는 더 거세졌고 나는 거미줄을 치는 거미를 보는 일이 아니더라도 이 자전거 보관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나는 원래 우산이 귀찮아 비 같은 건 그냥 맞고 다니는데 아무리 그래도 폭우 속을 걸어갈 수는 없었고 꼼짝없이 자전거 보관대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세워진 자전거와 자전거 사이에 자전거처럼 서서 거미줄을 치는 거미를 봤다. 비가 들이쳐 거미줄에 물방울이 튀었다. 거미는 작은 빗방울에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다가 큰 빗방울이 들이치자 깜짝 놀라며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한번 구석으로 들어가버린 거미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비가 잦아들어 내가 자리를 뜰 때까지 거미는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조금 내렸다가 많이 내렸다가 했다. 나는 비가 조금 내리는가 싶을 때 잽싸게 나가 자전거 보관대로 갔다. 전날 서있던 자리에 똑같이 서서 자전거 보관대의 기둥과 천장 사이를 올려다봤는데 거미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자리를 착각했나 싶어 다른 곳도 둘러봤는데 아니었다. 거미는 짐을 싸 떠난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산책을 하다 자전거 보관대를 지나칠 때면 거미 생각이 났고 거미를 좋아하게 됐다.
오랜만에 자전거 보관대에 가보자 싶어 싫어하는 골목 하나와 좋아하는 골목 두 개를 지나쳐 걸었다. 자전거 보관대에 도착해 전에 서 있던 자리를 찾는데 그 자리에는 새로운 자전거가 묶여 있었다. 자전거에 달린 물통과 안장에는 먼지가 노랗게 쌓여 있었다. 나는 그 자전거의 뒷바퀴를 발과 발 사이에 두고 엉거주춤 서서 자전거 보관대의 기둥과 천장 사이를 봤다. 거기에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거미가 가면 다른 거미가 오는구나. 다른 거미가 와서 같은 자리에 거미줄을 치는구나. 나는 거미줄을 치는 거미를 적당히 지켜보다가 윤의 작업실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끼익 소리가 났다. 윤은 사라지고 없었다. 조각하던 것도 그대로 있고 윤이 앉았던 의자도 그대로 있었는데 윤만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윤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거미가 사라진 자리에 다른 거미가 있었던 것처럼 윤이 사라진 자리에 내가 앉았다. 나는 거기에 앉아서 윤이 쓰던 조각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조각을 하는 윤을 흉내 냈다. 처음에는 윤의 작품을 망칠까 조각칼을 멀리 대고 조각하는 흉내를 내다가 점점 가까이 칼을 댔다. 점점 가까이 점점 가까이. 조각칼과 작품에는 아주 작은 간격만이 있었다.
뭐하는 거야?
흉내 내고 있었어.
무슨 흉내?
거미 흉내. 어디에 갔었어?
윤은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서 다시 작업을 시작하는가 싶더니 더는 작업을 하지 못했다. 윤의 작업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밖은 갑자기 쏟아지는 빗소리로 가득했다. 여름이 시작되고 며칠째 이런 폭우가 갑자기 쏟아지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치고 다시 무섭게 쏟아지는 날씨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다음을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윤의 작업실 천장은 변덕스러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어가는 것 같았다. 원래 누가 죽으면 다른 누구는 우는 법이라 천장에서는 눈물 같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윤은 그걸 끊임없이 닦아내다가 작업실 주방에서 작은 냄비를 가져와 빗방울을 받쳤다. 냄비에 빗방울이 가득 차면 작업실 안에 있는 식물에다 부었다. 그것도 세 냄비쯤 하자 더는 물을 줄 식물이 없었다. 이제 바닥에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뿐만 아니라 화분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물까지 더해지고 있었다. 윤은 빗방울로 가득 찬 작은 냄비를 옆으로 치우고 다른 냄비를 가져왔다. 나는 이 냄비를 알고 있다. 이 냄비는 영실 씨가 무지하게 아끼는 냄비였다. 그 냄비를 바닥에 내려놓으려는 윤을 내가 빤히 바라보자 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영실 씨가 아끼는 냄비를 바닥에 내려놓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쳤다. 영실 씨가 아끼는 냄비는 아까 받쳐두었던 작은 냄비보다는 훨씬 커서 훨씬 많은 빗방울을 받을 수 있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개수를 셀 수 있어서 멍하니 개수를 세었다. 하지만 어디까지 세었는지 까먹으면 다시 셀 수는 없었다. 빗방울이 모여 있는 영실 씨의 냄비 안을 들여다보아도 그 안에 빗방울이 몇 개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냄비 안에 담긴 빗방울들을 커다란 빗방울 한 방울로 생각해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비는 그쳤다. 비가 그치자 천장에서도 빗방울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비는 그쳤는데 바닥에는 내린 비가 그대로라서 바지 밑단이 젖어들어 갔다. 기억 같아. 일은 끝났는데 기억은 남아 있다. 있었던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있었던 일의 가장 나쁜 점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생각을 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 이마 위로는 벌레가 기어갔다. 나는 내 이마 위로 벌레가 살금살금 기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가만히 있었다. 절대로 놀라지 않았다. 이마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구나, 했다. 벌레는 이마에서 관자놀이로 기어 내려갔다. 관자놀이에서 볼을 타고 기어 내려갔다. 볼에서 턱으로 기어가는 순간, 살며시 손으로 벌레를 잡았다. 벌레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 이마를 타고 볼까지 내려온 건 벌레가 아니라 땀방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윤에게 더우니 에어컨 좀 켜자고 했다. 윤은 알았다며 에어컨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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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아 안심제를 바라본다. 계단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처럼 안심제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많다. 의자는 박수철네 공장에 물건을 보러갔다가 얻은 것이다. 통으로 자른 느릅나무에 위에 빨간 가죽 쿠션을 씌운 의자인데 박수철도 어디에선가 얻었다고 했다. 의자는 귀엽고 예쁜데 공장에 있으면 먼지만 쌓인다며 나에게 줬다. 나는 한동안은 그걸 집으로 가져가 침대 옆에 두고 스툴 대신으로 썼다. 그런데 침대 옆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아서 스툴 대신이랄 것도 없었다. 의자로써도 테이블로써도 역할을 하지 않았고 침대와도 어울리지 않아 장식으로써도 기능하지 못 했다. 그걸 차에 실어 안심제로 가져왔다. 안심제에 있는 의자는 의자로서도 테이블로서도 장식으로도 기능을 했다. 집에서는 아무 기능도 하지 않던 의자가 안심제에서는 여러 기능을 했고 어떤 날 이 의자에 앉아 나도 모르게 꾸벅 졸았을 때는 침대의 기능까지 하는 건가 싶었다. 아무튼 의자를 가져다 놓은 뒤로는 계단을 만드는 시간보다 의자에 앉아 안심제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의자가 있기 전에는 차 트렁크에 실어뒀던 포대를 안심제 앞 풀밭에 깔아놓고 앉거나 누웠다. 의자 위에 앉으면 포대 위에 앉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게 보였다. 의자 위에 앉으면 포대 위에 앉았을 때는 보였던 것들이 안 보였다. 이 포대는 내가 나주시 공산면을 지날 때 길에서 주웠다. 근처 한우 농가에서 굴러온 소 사료 포대였다. 이걸 막 주웠을 때는 발효된 소 사료 냄새로 지독했다. 그래도 깨끗이 씻으면 무엇으로든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그걸 차 트렁크에 실어두었던 것이다. 처음엔 지독한 냄새가 차 안을 뒤덮었다. 씻어야지, 씻어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냄새는 저절로 사라졌다. 냄새는 저절로 사라진다. 저절로 사라지는 것. 녹는 얼음. 얼음은 녹는다. 얼음 두 개가 담긴 작은 잔을 세면대 위에 두고 샤워를 하고 나면 얼음은 사라지고 없다. 물은 있다.
① 작은 잔에 든 이 물은 얼었던 물이게요, 아니게요?
얼지 않았던 물이요.
다시.
② 작은 잔에 든 이 물은 얼었던 물이게요, 아니게요?
얼었던 물이요.
다시.
③ 트렁크에 실린 포대에는 뭐가 담겨 있었게요?
모르겠는데요.
냄새는 사라지고 없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뭔가가 남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면 없는 거야. 길을 가다가 바람에 날아가는 나뭇잎을 보고 다람쥐인 줄 알았던 적이 있다. 길을 가다가 가만히 앉아 있는 새를 보고 누가 버리고 간 쓰레기봉투인 줄 알았던 적도 있다. 움직이면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 같고 안 움직이면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 같다. 그러면 느리게 움직이자. 마구 헷갈리도록. 죽은 것 같기도,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도록.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곳에 있는 저수지의 물결처럼. 그 위를 둥실 떠다니는 잠이 든 물고기처럼. 나는 크게 하품을 하고는 포대 위에 누웠다. 계단을 연결해야 하는데 잠이 쏟아졌다. 잠이 쏟아지면 물속으로 사라진 여자는 이제 세상에 없는 여자 같고, 그래서 계단이고 뭐고 조금 자고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자주 이렇게 잤고 두 시쯤 잠이 들면 다섯 시가, 네 시쯤 잠이 들면 일곱 시가 되어 있었다. 내가 한참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내 광대뼈를 톡, 두드렸다. 나는 눈을 뜨지 않고 여전히 잠이 든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누군가 내 광대뼈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눈을 뜨지 않고 여전히 잠이 든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눈을 뜨면 안심제에 펼쳐둔 포대와 느릅나무 의자와 만들다가 만 계단과 스테인리스 조각들을 모두 챙겨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할까 봐 눈을 뜨지 않고 여전히 잠이 든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내 광대뼈를 두드렸던 누군가는 더 이상 나를 두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다가 다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캄캄했고 그 사이 이슬비가 조금 내렸는지 주변이 조금 축축했다. 나는 누운 채로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느릅나무 의자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나는 느릅나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수백 번도 더 본 적이 있는 뒷모습. 나는 언제나 작업을 하고 있는 윤을 지켜봤기 때문에 윤의 앞모습보다도 뒷모습을 더 많이 봤다. 윤이 입고 있는 티셔츠들 앞에 어떤 무늬가 있는지는 잘 몰랐지만 윤이 입고 있는 티셔츠들 뒤에 어떤 무늬가 있는지는 아주 잘 알았다. 지금은 너무 캄캄해서 티셔츠의 무늬 같은 건 보이지 않았지만 고개가 기울어져 있는 각도나 어깨의 모양이나 앉아있는 자세만으로도 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주 느리게 그리고 아주 조금씩 윤에게 다가갔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곳에 있는 저수지의 물결처럼 죽은 것 같지도, 살아 있는 것 같지도 않은 걸음으로 조금씩 윤에게 다가갔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사다리차가 꺾였대.
뭐라고?
경기 고양시 탄현동 아파트 19층에서 사다리차가 꺾였다고.
나는 내가 누워 있던 포대를 윤이 앉아 있는 느릅나무 의자 옆으로 질질 끌어 가져다놓고 그 위에 앉았다. 윤과 나는 나란히 앉아서 캄캄한 저수지를 바라봤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꼭 저수지가 없는 것만 같아서 뭐라도 보려고 노력했다. 보려고 노력하니까 뭔가가 보였다. 아주 천천히 출렁이는 저수지의 물결. 나는 윤에게 물이 움직이는 게 보이냐고 물었다. 윤은 보인다고 그랬다. 물결도 보이고 물 위에 비친 가로등 빛도 보인다고 그랬다. 물 위에 비친 가로등 빛을 자세히 보면 물결의 모양도 보인다고 그랬다. 정말 그랬다. 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윤과 나는 자리를 바꿔 앉았다. 자리를 바꿔 앉은 나와 윤은 다시 한참 저수지를 보았다. 물고기 한 마리가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나는 윤에게 수면 위로 튀어 오른 물고기 한 마리를 보았냐고 물었다. 윤은 못 봤다고 그랬다. 수면 위로 튀어 오른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 수면 위로 튀어 오른 물고기 한 마리를 본 내가 있다. 수면 위로 튀어 오른 물고기 한 마리를 보지 못한 윤이 있다. 그 다음, 물고기 두 마리가 수면 위로 튀어 오르지 않았다. 나는 윤에게 수면 위로 튀어 오른 물고기 두 마리를 보았냐고 물었다. 윤은 못 봤다고 그랬다. 맞다. 물고기 두 마리는 수면 위로 튀어 오르지 않았다. 그 다음, 물고기 세 마리가 수면 위로 튀어 오르지 않았다. 나는 윤에게 수면 위로 튀어 오른 물고기 세 마리를 보았냐고 물었다. 윤은 ‘드디어 봤다’고 그랬다. 윤은 수면 위로 튀어 오른 물고기 세 마리를 보았다. 나는 수면 위로 튀어 오른 물고기 세 마리를 못 봤다. 이 저수지 안에는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을까. 이 저수지의 수심은 몇 미터나 될까. 물 위로는 물고기도 튀어 오르고, 누가 버리고 간 페트병도 둥둥 떠다니고, 여자의 기다란 머리카락 같은 것도 흐느적댔다. 그러나 물속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계단 같은 거 만들지 마. 꺾이면 어쩌려고.
아래로 내려가는 거라 괜찮아.
그래도 계단 같은 거 만들지 마. 들어가서 어쩌려고.
들어가려는 게 아니라……
나오게 하려는 거야. 윤은 계단 같은 거 만들지 말라고 했지만 하기로 한 일은 하기로 한 일이고 하지 않기로 한 일은 하지 않기로 한 일이다. 나는 이 생각을 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윤을 조수석에 태우고 윤의 작업실로 갔다. 윤은 남은 작업이 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윤에게는 언제나 남은 작업이 있었고, 하나의 작업이 끝난다고 해도 바로 다음 작업이 시작됐고, 실은 그 모든 작업이 연결돼 있어서 끝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작업을 하는 윤의 모습을 언제라도 실컷 볼 수 있었다. 지겹지도 않았다. 작업실로 돌아온 윤은 손만 씻고 자리에 앉아 깎던 것을 깎았다. 작업을 하는 윤은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얼핏 봐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꼭 죽은 사람 같았다. 앉아서 죽은 사람. 나는 윤이 정말로 죽은 게 아닌가 싶어서 무서웠다. 나는 윤이 눈치 채지 못 하게 조금씩 다가갔다.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발을 아주 조금씩 게걸음질하며 1센티씩, 아니면 2센티씩 다가갔다. 마침내 윤의 등 뒤로 바짝 붙어 앉았을 때 윤의 어깨 너머로 윤의 얼굴을 바라봤다. 윤은 눈을 뜨고 있었다. 눈을 깜빡였다. 가슴이 작게 오르내렸다. 조각칼을 쥔 손이 움직일 때마다 재료에서 떨어져 나온 가루가 날렸다. 가루는 어찌나 조금이던지 바닥으로 쌓이지도 않고 윤의 주변으로 흩어졌다. 죽지 않았구나, 역시. 너무 조금씩 작품을 깎느라고 죽은 것처럼 보였던 거구나, 아니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거구나. 나는 무언가를 만드는 윤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다시 안심제로 돌아갔다.
*
물속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낮이든 밤이든 물속의 깊은 곳은 보이지 않는다. 거기엔 얼마나 많은 것들이 가라앉아 있을까. 너무 오래 가라앉아 있어서 부서진 것들도 있을 것이다. 뭉개지고 흩어진 것들도 있을 것이다. 아주 작게 조각조각 나서 아주 작은 점이 된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멀리서만 보자. 가까이 보지 말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멀리서만 보자. 전부 점처럼 보이도록. 멀리서 보면 모두 다 점이다.
그러나 빛나는 점. 눈을 감아도 잔상으로 남는 빛나는 점.
나는 점처럼 흩어져 있는 스테인리스 조각들을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맨 아랫부분부터 안심제에 집어넣으며 계단을 쌓아올렸다. 계단은 맨 아랫부분부터 물에 잠겼다. 내 눈앞에서는 사라지는 일이 물 아래에서는 나타나는 일이고, 그러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딘가에서는 보이는 것일 테고, 여기에서는 여자가 죽었다고 하지만 저기에서는 여자가 살았다고 할 것이다. 계단은 점점 물속에 잠겨 사라진다. 계단은 마침내 전부 물속에 잠겨 사라진다. 눈물방울은 빗방울과 같아서 개수를 셀 수 없고 하염없이 흐르는 방울들을 그저 커다란 한 방울이라고 여겼다. 주변에 있는 아무 나뭇잎들을 주워 얼굴을 닦았다. 닦았던 나뭇잎들을 안심제에다 던졌다. 나뭇잎들은 너무 가벼워서 안심제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안심제 위를 둥둥 떠다녔다. 나는 나뭇잎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뭇잎을 지켜보려고 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뭇잎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그만 기다리기로 하고 집으로 갔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옷이 더러울 텐데. 안심제에 있는 느릅나무 의자를 다시 가져와야겠다. 옷이 더러울 때 그 의자에 앉아야겠다. 옷장에 달린 거울에 내가 비쳐 보였다. 얼굴에 바스러진 나뭇잎 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걸 하나씩 떼어 작은 쓰레기통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