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을 가본 적 없어요. 서른이 되도록 국경선을 넘어보지 못한 게 어떤 이들에게는 유별난 경우에 속한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비행기 타는 걸 병적으로 무서워한다거나 한국이 좋아서 단 며칠도 떠나기 싫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에요. 왜인지 스스로 외국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외국을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질 못했거든요. 물론 이 많고 많은 세상 사람 중에 해외를 나가본 적 없는 이가 저 하나뿐이겠냐마는, 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인들은 모두 진정한 국제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출입증처럼 자기 이름으로 된 여권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더라고요.
제게는 드물게 그런 삶으로 출입한 기록이 없음을 깨닫는 건 이야기를 통해서입니다. 이를테면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하는 점심시간, 여름휴가 때 무얼 할 것이냐로 시작된 대화는 흘러 흘러 외국으로까지 가닿습니다. 전염병으로 하늘길이 막힌 뒤 오랫동안 해외여행에 목말라 있는 그들은 차례를 돌아가며 언젠가 자신이 가보았던 나라의 인상적인 풍경과 특이한 문화를 이야기로 풀어놓아요. 프랑스 파리에서 먹었던 ‘진짜’ 크로아상 맛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든지, 아프리카 여행에서 다리를 좍 벌린 희한한 자세로 강물을 마시는 기린을 보았다든지, 중국 어느 도시의 공중화장실에는 칸막이 문이 없어서 아팠던 배가 쏙 들어갔다든지 하는 동료들의 이야기는 그곳에 가본 적 없는 제게도 흥미롭게 기억될 따름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외국의 거리 곳곳을 머릿속에 그려봐요. 그가 파리의 카페에서 먹은 진짜 크로아상은 내가 동네 빵집에서 사 먹는 크로아상과 어떤 게 다를까. 기린은 그 불편한 자세와 기다란 식도로 잘도 물을 마시나 보다. 정말로 문이 없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민망스럽겠구나. 그것이 저와 무관한 세계이든 아니든 그들이 들려주는 낯설고도 신기한 이야기를 경청하는 건 언제나 자신 있습니다. 아니, 저와는 무관한 세계이기 때문에 귀를 기울일 밖에요. 모르는 도시의 공중화장실 칸막이 칸 안에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저는 그들을 관망하는 자세로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얘길 듣곤 하는데, 가끔은 불쑥 누군가가 옆에서 칸막이를 두드리는 당혹스러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이야기꾼의 역할이 제게로 넘어오고야 마는 순간이죠. 동료들은 차례를 모두 도는 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저를 보며 이제 당신이 다녀온 여행지의 기억을 들려달라고 발언권을 넘겨주지만, 가까운 이웃 나라는커녕 고향인 광주 밖 여행을 떠나본 적도 그리 많지 않은 저로서는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없을 수밖에요.
해외여행을 가본 적 없어요. 제가 멋쩍은 웃음으로 그렇게 대답하면 그들은 아주 잠깐 무언가를 생각―아마도 제가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한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들이겠죠―하는 표정으로 저를 빤히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다른 화제를 찾아가요. 내색하지는 않지만, 그런 순간이 썩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모두들 즐겁게 떠들고 노는 파티에서 저만 혼자 겉돌면서 복도나 서성이는 기분이거든요. 평소에도 저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지나치게 말이 없다고 지적을 받고는 하는데, 제가 과묵한 사람이 되어버린 데에는 어쩌면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는 것도 한몫할 겁니다.
그럴 때면 그들의 이야기는 뭐랄까요, 제가 그 너머로 갈 수 없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너머의 풍경을 비춰주는 높은 층 창문 같습니다. 마음껏 내다볼 순 있지만 넘나들 수는 없어요. 어디까지나 그들의 기억과 표현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에 의해서만 전해지는 소문의 세계인 거죠. 물론 그 창문이 오로지 대화를 통해서만 열리는 건 아닙니다. 누군가는 지구 곳곳을 누볐던 여행기를 책으로 써냅니다. 그곳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기도 할 테고요. 활기 넘치는 어느 도시의 밤거리는 화가에 의해 그림으로 박제되기도 해요. 그 수많은 종류의 창문을 여닫는 사이 저는 출입기록 없이도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 세계로 틈입할 수조차 없다는 점이 유쾌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저로 하여금 더 넓은 식견과 세계관을 가지게끔 한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국경선을 넘지 않아도, 심지어는 그 시간을 직접 살고 있지 않아도요. 저는 기린과 얼룩말이 뛰노는 보츠와나의 국립공원을 친구의 여행담으로나마 엿보게 됩니다. 살아본 적 없는 메이지 시대 일본은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의 책에서 보았고요. 가본 적 없는 월 스트리트와 루브르 박물관은 모두 영화에서 보았습니다. 또 모두가 그 세계를 다 살아볼 수는 없을 테니 저만이 타인의 이야기에 의지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제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바깥세상을 흥미롭게 내다보다가도 자주 복도를 서성이는 쓸씀함을 느끼는 건, 저야말로 사람들 사이에서 유창한 이야기꾼이 되고 싶기 때문인 듯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신만의 경계에 갇혀 살게 마련이고 어디든 언제로든 가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사랑받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니까요. 그간 스스로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이야기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만, 제게도 그런 열망이 있음을 밝혀야겠습니다. 비록 멀리 가보지 못한 탓에 제 이야기는 시야를 넓혀주는 높은 층 창문이 되어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이룬 것도 가진 것도 많지 않은 예사로운 삶을 살아온 만큼, 누구나 마음껏 넘나드는 낮은 문턱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