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假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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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야

   앞날은 약속돼 있는 게 아니고


   더러운 공기만 마시다 돌아오는 밤들도 있었어


   지나간 일들을 담벼락에 빼곡히 적는 동안에도

   내가 하는 건 풀밭에 돗자리를 펼치는 일

   발이 삐져나오는 건 참을 수 없어서 머리를 내밀지


   가방 안에는 속을 다 파낸 비누가 있어

   날아갈 듯하고 향기로워


   자동차 키에 깜찍한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하늘 자전거를 탔어

   

   두 다리로 허공을 휘젓는 기분


   머리카락에는 벌레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할 일을 하고

   서로의 몸을 더듬고 뽀뽀도 하는 것 같아


   우리가 함께였을 때 행복했다는 것을

   나도 언젠가 너와 같은 방식으로 기다리게 될 거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길이 없는 곳은 자동차로 갈 수 없고

   생각으로만 오직 생각으로만 갈 수 있다가

   생각으로도 그런 생각으로도 갈 수 없어질 때


   홀딱 벗고 몸을 씻는 거야

   좋은 냄새가 나는 좋은 비누로

   내 몸이 좋은 냄새로 가득 찰 때까지


   물론 중간에 나쁜 말도 했지만

   과거는 일단 덮어둬


   미래의 저편으로 넘어가기 위해

   미끄러진 자리에서 또 미끄러진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자세로


가정(假定)


김조라


2023

시, 37행에 396자. 서로의 몸을 더듬고 뽀뽀도 하는 것 같아.


   기다리는 일
  

   

   단단하게 언 호수 밑에 집을 짓고

   침대를 만들었어

   서서 기다리는 게 지겨워서

   거미는 시계처럼 걸어두고

   분절하는 초침 소리

   종일 창밖만 째려보고 있어

   

   그물로 지은 마당은 여러가지와 닮았고

   어떨 땐 강물로 어떨 땐 파란색 파라솔로

   징검다리를 걸어가는 물고기와

   신호등을 포박한 거미줄

   

   전화벨이 울리고

   창밖에 바람 냄새가 진동해

   금색으로 변한 은목서와

   와르르 쏟아지는 물방울들

   호수 위에 사는 물방개

   얼어죽겠다

   

   작년은 어제보다 훨씬 추웠거든

   사거리 마음씨 좋은 돌 공장 주인에게

   이끼 낀 담요를 빌려와

   여름에 했던 말은 책상 속에 삼켜두고

   

   징검다리를 건너던 물고기는

   돌에서 미끄러졌다 유연하게

   허리춤에 얼음 조각을 주렁주렁 매달고

   물속을 헤엄치는 머리 긴 아가씨

   

   지옥에서는 손을 잡고

   천국에서는 잡은 손을 놓는다는 귀신 이야기를

   뒤집어 쓴 아가씨야

   호수 밑에 사는 내가 기꺼이 손을 내밀고

   너를 기다리고 있어

   

   꽁꽁 굳어버린 이곳에

   공기 방울을 불어넣어줘

   물과 물이 부딪히는 소리는 무시하고

   내가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와도 좋아


기다리는 일


김조라


2023

시, 39행에 383자. 징검다리를 건너던 물고기는 돌에서 미끄러졌다 유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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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라

시와 짧은 소설을 쓴다. 효천로를 지날 때 임암교에 서서 대촌천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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