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껍질을 천천히 까듯이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네가 얼굴을 드러내듯이
대화는 의도 속에서 시작된다
너는 과즙을 머금은 채 알알이 뭉쳐져 있고
나는 미각이 폭우에 갇힌 것만 같다
부딪치고 부딪치고
비유하다가 직설적으로 말하다가
다시
설명적으로
처음은 이렇다
내 인생 첫 시를 시인이 되고 다시 읽는 순간처럼
부끄러운 민낯이야
감정이 벌거숭이라도 된 거 같아
너는 민망해하지 않게
다음 과즙을
다음 감각을
파도가 다음 파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밀려오듯이
애월 바다 한가운데에 있게
배를 타고
친구와 함께 사진을 찍고
흔들리는
너와 내 얼굴이 뒤죽박죽 섞이는
그러다 나와 술을 마시다 눈물 흘리는 이모
다음에 또 오라고 마지막 인사 전하는 할머니
청주에서 할머니의 장례식에 못 가 눈물 흘리던 엄마
너는 페이지 같아
어쩌면 문진
아니면 책장
수많은 책이 엎어지는 지진
우리는 그 순간 향연
다시 대화
자꾸만 생각나는
미끄러지다가도 다시 되돌아오는
그렇게 너는 귤처럼
겨울이면 잔뜩 쌓여 있는 귤처럼
너는 귤을 모아 시인이 됐어
마지막 한 알이 입안으로 들어오듯이
귤의 향연
김도경
2026
시, 53행에 391자. 나는 귤을 모아 시인이 됐다.
성급한 행동이 잦던 내가
가끔씩 우발적인 말을 하기도 하는 내가
종이 앞에서는 숨을 고른다
첫 문장을 어떻게 적을지 찬찬히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나와 가까운 말은 어렵게만 적힌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시를 쓸 때 그들에게 전하는 편지가 아닌 척 상상하고 은유한다
사실 전부 그들에게 전하는 말들의 기록인데
은유에 숨고
문장에 숨는다
문장은 스스로를 벗겨내는 일이라고 배웠는데
시를 쓰는 일은 이전의 나와는 이별하는 일이라고 배웠는데
나는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척 쓰는 사람이 됐다
연필로 첫 문장을 적어낸다
수많은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에게 문장을 빚지듯이
서류봉투에 시를 묶어 투고하던 마음으로
시인을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던 순간으로
나는 사실 당신이 되고 싶었다
당신처럼 진심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좋다고 말하면 너무 상처받을까 봐 말하지 못했을 뿐
나는 사실 이 일을 좋아한다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은 시를 쓰는 순간이라고
종이 앞에서
내가 하는 일을 다시 정의하기로 한다
내가 적어온 문장들이 최선으로 진실에 가까워지게
종이 앞에서
김도경
2026
시, 35행에 394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시를 쓰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