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책’은 공통점 안팎으로 정독하고 싶은 ‘사람책’들을 만나는 대담 기록입니다. 물음과 응답 속에서 사람들이 지닌 공통점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세 번째 사람책으로,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 『폭포 열기』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을 잇따라 펴내며 사랑을 기둥 삼아 언어의 집을 축조하는 김연덕 시인을 읽어보았습니다.
Q. 김연덕 시인님, 안녕하세요! 공통점의 세 번째 사람책이 되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독자분들께 시인님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2018년에 대산대학문학상으로 활동을 시작한 김연덕이라고 합니다. 이제 한 달만 지나면 만으로 서른이 되어요. 20대에는 왠지 모르게 30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막상 이 안에 들어와 보니 전보다 편안하고 많은 것들이 보이고 좋습니다. 창이 크고 해가 잘 들어오는, 안락한 집 같은 나이를 얻은 기분이에요.
Q. 해가 잘 드는 안락한 집이라니, 30대란 나이가 새삼 근사하게 느껴지네요! 올해 서른을 앞두고 어떻게 지내셨나요?
일상에 변화가 많은 연초였습니다. 특히 2월에는 부산스럽고 피곤한 즐거움에 잠겨 있었던 것 같아요. 커다란 사건을 두 가지 꼽자면 이사와 아르바이트인데요. 먼저, 7년간 살았던 서촌 근방을 떠나 은평구로 이사하게 되었답니다. 좋아하던 동네를 떠나온 것이 며칠간 황망하고 아쉬웠지만, 제 예상보다 새 동네와 더 빠르게 사랑에 빠졌어요. 참 아늑한 동네예요. 아침마다 아파트 단지에 떨어진 작은 솔방울들을 보면서 버스를 타러 갑니다. 목재로 된 기둥이 받치고 있는, 목재 테이블과 목재 식기가 많은 카페들은 다른 동네의 카페들보다 수줍지만 당찬 느낌이고요. 무엇보다 전에 살던 집의 방에는 햇볕에 전혀 들지 않아 종일 암흑 속에 살았는데, 지금 제 방에는 볕이 정말 잘 들어와요. (오후 5시 30분부터 오후 6시 사이, 해가 질 때의 볕이 책장 안을 가득 채우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작업실 창밖으로는 울창한 나무가 보이고요.
그리고 지난달부터 일주일에 3일간, 한 달에 열두 번 정도 레스토랑에 아르바이트를 나가게 되었어요. 저는 주로 저녁에 외부 수업을 하거나, 낭독회나 북토크 같은 행사를 하거나 과외 수업을 하는데요. 따로 직장에 다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전부터 낮 시간 동안은 통째로 비어 있을 때가 많아요. 보통 그 시간에 원고 작업을 하곤 했고요. 올해는 저축도 규칙적으로 하고, 일상을 조금 더 부지런히 꾸려가고자 낮 시간들을 쪼개 써 보기로 했어요. 저녁 전까지 아르바이트도 하고, 원고도 쓰는 거죠.
스무 살 때부터 식당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해오긴 했지만, 지금 나가는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의 아르바이트는 처음이에요. 식사 가격이 매우 비싸고, 레스토랑을 채우고 있는 가구나 식기도 제가 만져본 적 없는 것들이라 매 순간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요. 지난주 금요일에는 레스토랑이 조금 한가해서 내부를 아주 샅샅이 관찰할 수 있었는데요. 커튼과 의자, CD플레이어, 난로와 테이블의 나뭇결과 날렵한 촛대들. 하나하나 먼지를 털고 바라볼 때면 사물들에게서 멈춰져 있던 시간이 흐르는 듯했어요. 물 같고 피 같은 감정이 느껴졌죠. 먼지떨이로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털던 순간이, 제가 지난주 감각한 가장 아름답고 환하고 두려운 순간이었습니다.
김연덕 시인, 낭독회의 대기실에서.
Q. 새해에 새집과 새 일까지… 시작과 적응으로 분주한 연초였을 것 같아요. 게다가 원고 작업에 수업까지 충분히 여러모로 다망하게 지내고 계시는데, 쉬실 때는 어떻게 휴식을 취하시는지 궁금해요.
주말 오전이나, 원고를 마감한 뒤 평일 늦은 저녁에 집 근처 영화관에 가요. 그럼 거의 사람이 없거든요. 많아야 6-7명 정도가 함께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띄엄띄엄 앉아있는 사람들을 볼 때면 이 시간에 영화를 보러 온 저 사람들의 낮은, 평일은 어땠을까 궁금해져요. 씨네큐브와 에무시네마 근처에 살았던 이십대 중후반에는 독립 영화관을 무척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좋아요. 팝콘을 먹지 않을 때에도 팝콘 냄새를 맡으며 영화관에 들어가는 순간이 좋고, 화려하게 (밤에는 그래서 더 쓸쓸하게) 돌아가는 전광판과 뽑기 기계들을 지나 너무 비장한 마음 없이 상영관으로 진입할 수 있는 순간이 좋아졌거든요.
가장 최근의 영화관으로는, 지난 목요일에 집 근처의 롯데시네마에 갔는데요. 영화 상영 사이에 틈이 있었는지 20분 정도 먼저 관에 들어갔었어요. 늦은 밤 시간이었는데 저 혼자였고, H열에 앉아 텅 비어 있는 영화관을 내려다봤죠. 센 조명 아래 어떤 소리도 영상도 없이 비어 있던 붉은 좌석들은 제게 이상한 느낌을 주었어요. 조금 무섭기도 했고요. 5분 정도를 남겨두고 나서야 사람 다섯 정도가 더 들어왔어요. 그러곤 곧 불이 꺼졌죠. 그날 영화 〈아노라〉를 보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막차를 기다리는 동안 참 행복했어요. 정류장을 지나는 초봄의 바람에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꼈죠. 좋은 이야기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음에 커다란 감사함을 느꼈고요.
Q. 지난 2021년에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를 내고, 작년 9월에 두 번째 시집 『폭포 열기』를 펴냈어요. 두 시집 사이에는 어떤 시간들이 있었을까요?
첫 시집의 근간이 되었던 감정이 ‘사랑’이라면, 두 번째 시집에서는 시편들 곳곳 ‘수치’가 묻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도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에 중요한 사람을 만났고, 중요한 사랑을 한 것 같아요.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 미래 속에 스스로를 내던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랑과 수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은데요.
격렬한 사랑 속에서는, 사랑이 실패해가는 과정 속에서는 정말 끝없는 수치심을 경험하게 되잖아요. 아마 크고 작은 수치의 모양과 결을 더 많이, 더 자주 감각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아프고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쓰면서 그 시간들을 안아주게 되는 신비로운 체험을 했어요. 그러면서 사랑과는 관계없이 제게 내재되어 있던 최초의 수치심, 일상의 수치심, 내일도 모레도 계속될, 끊어낼 수 없는 수치심들에 대해 숙고하게 되기도 했고요. 수치 없이 매일을 사는 사람은 없으니, 이 책이 그런 막막함과 어두움 속에서 조금의 숨을 쉴 수 있는 자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김연덕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
Q. 수치스러움은 보통 감추거나 외면하기 급급한 감정이자 경험일 텐데, 그걸 안아주려 한다는 게 참 용감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부끄럽단 이유로 어떠한 수용도 재고도 없이 내버려 둔 기억들을 떠올려보게 되고요. 시집의 제목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여기서는 폭포를 ‘열다’와 폭포의 ‘열기(熱氣)’라는 중복된 의미가 중요한 듯해요. 여러 편으로 폭포 연작이 실려 있기도 하고요.
맞아요. 짐작하셨겠지만, ‘폭포’는 넘치도록 터져 나오는 제 안의 수치를 반복적으로 생각하며 떠올린 이미지인데요. 현실의 물리적인 폭포는 무척 차갑겠지만, 이 폭포는 내면의 폭포이기에 아주 뜨겁고 열감이 느껴지기도 해요. 제가 생각하는 수치심의 온도도 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 피가 다 식어버릴 것처럼 차가운 기분과 몸이 다 터져버릴 것처럼 뜨거운 기분을 동시에 안고 있는 상태요. 차갑거나 뜨겁다고 한쪽으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양 극단의 온도를 동시에 느끼는 상태 같아요.
저에게 이 시집을 작업하는 과정은 그 폭포를 ‘열어보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폭포의 ‘열기(熱氣)’를 ‘열어’보았던 시간들의 모임이지요. 비하인드를 말씀드리자면, 사실 처음 이 책을 구상했을 때 제목이 ‘폭포 열기 열기’였어요. 친구들 몇에게 의견을 물어보니, 다들 ‘열기’를 한 단어 빼는 것이 훨씬 강렬할 것 같다고 말해주었어요. 저도 중복되어 읽히는 단어로 제목에 혼동을 주고, 자유를 주는 방식이 더 좋다고 느껴 원고의 제목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Q. 말씀대로 부끄러울 때 느껴지는 달뜬 얼굴과, 나를 둘러싼 것들에 차게 식어버리는 감정이 동시에 떠올라요. 그걸 미지근한 온도나 “나를 구하지도/버리지도 않는/나의 수치심”(시인의 말)으로 일컫는 걸까 짐작해보게 되고요. 내면의 열기를 연다는 것과 시집의 표지를 여는 행위도 흡사하게 다가오는데요, 그런가 하면 뒤표지에 실린 짧은 산문에는 이자카야에서 우연히 눈에 띈 한텐 차림 남자를 묘사하고 있어요. 어쩌면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장면일 텐데, 거기서 “시시하고 생생한 삶” 가운데 예기치 못할 아름다움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고 쓰셨죠. 시시하게 느껴지는 일상 곳곳에서 무심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래서 자칫하면 지나치고 마는 아름다움들을 포착하는 게 시인님의 훌륭한 재능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존재가 우리 삶에 있음을 시인님의 시로써 상기하는 것 같고요.) 그게 부럽기도 해서, 저도 거기에 가면 비슷한 아름다움을 목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그날 혹은 그곳에 얽힌 이야기가 더 있다면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 공간은 저에게 무척 각별한데, 시집 뒤표지에 실린 대로 2023년 12월 30일에 처음 방문한 곳이에요. 친구들과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고, 못다 한 회포를 풀기 위해 2차를 가려던 참이었죠. 저와 친구들이 미리 찾아두었던 곳들이 모두 만석이라 한동안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길에서 헤맸던 것 같아요. 무척 추운 날이었죠. 그러다 골목 안쪽 반층 아래의 한 아담한 이자카야를 발견했는데, 그곳이 바로 연남동의 ‘불철’입니다. 저와 친구들은 바 테이블의 모서리에 직각 형태로 모여앉아 하이볼과 간단한 안주들을 시켰어요. 얼마나 마셨을까, 제가 적었던 이야기 속 외국인 손님이 건너편에 등장했죠! 그 사람이 정말 아름다워서 보자마자 숨이 멎을 것 같았는데, 첫눈에 반하거나 성애적인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고 말 그대로 그의 아름다움 자체에 놀라움과 충격, 생의 감각을 느꼈죠. 너무 부끄러워서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지는 못하고 혼자만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지만요.
시집이 출간되고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과 다시 그곳에 방문했어요. 이곳에서의 이야기에요, 제 시집도 사장님께 전해드릴 겸요. 그런데 이미 사장님이 ‘불철’ 이야기임을 알고 계셨다고, 시집도 구매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불철’은 그렇게 저와 제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답니다. 1년에 두세 번은 꼭 모이려고 하는데, 늘 모임 장소는 ‘불철’이에요. 그곳에서 많은 술과 안주를 먹고요. 처음 방문한 것이 겨울이었는데, 한여름에도 방문해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기도 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공간에 대한 감사함이 커서, 출판사 행사가 근처에 있다거나 그것이 아니어도 우연히 연남동 근처에 있는 날에는 종종 혼자 가기도 해요. 직전 겨울에는 오타루에서 사온 푸른 사케 잔을 사장님께 하나 전해드렸는데, 제가 혼자 갈 때마다 그곳에 술을 따라 함께 건배를 해주세요. 그곳 사장님이야말로 작은 아름다움과 기억들, 손님들 개개인을 순간 포착하듯 소중히 대해주시는 분이에요. 언제든 방문하면 마음이 참 따듯해지는 공간이죠.
이자카야 ‘불철’. 두 번째 시집의 표사에 등장하는 이자카야다.
Q. 또 얼마 전에는 세 번째 시집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이 반 년 만에 출간되었어요. 세 번째 시집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세 번째 시집은 애초에 기획 시집으로 구성하고 작업하기 시작했어요. 시집의 모든 시들이 한 점, 정말 하나의 집으로 모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요. 언젠가 제 어린 시절과 어릴 적 살았던 집,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해보고 싶었는데 지금이 그 말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았어요. 저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서 나고 자랐는데요. 저에게는 무척 특별하고 생생하고, 많은 이야기를 지닌 동네입니다.
이전에는 저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조금 촌스러운 방식이라 생각했어요. 스타일을 만들고 그것을 최대한 세련되게 보이게끔 하려면 멀리 가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그런 생각들이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조르주 페렉은 『보통 이하의 것들』의 서문에서 “내국적인 것들의 인류학”을 구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문장을 썼는데, 그 문장을 읽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 이야기를 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그 이야기와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에 대해 제가 가졌던 이미지, 고정관념이 문제일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유년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어졌죠.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막상 작업에 들어가니 지금까지의 시집 작업들 중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2024년 4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시집의 모든 원고를 썼어요. 가장 단기간에 완성한 책이기도 하네요.
Q. 시집은 코트를 벗으며 기억 속의 집에 들어갔다가, 마지막 시에 이르러 “벗어두었던 코트를 다시 입을 시간”(「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이라고 말하며 끝나요. 시인님을 따라 집 곳곳을 들여다보고 나온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새 동네로 이사했다는 근황을 말씀해주시기도 했는데요, 어쩌면 어린 시절의 부암동 집을 떠났던 경험과 같이 최근에도 새집으로 이사하면서 비교적 짧은 시간 집필에 탄력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들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코트를 걸치고 문을 닫고 나와야 할 텐데요, 시인님은 언젠가 또 다른 집에서 살게 된다면 어떤 집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 들어보고 싶어요.
저는 원래 아주 마음에 드는 공간이나 동네, 누군가의 집에 방문하더라도 그곳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 편이에요. 미래에 대한 생각이라면…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이라든지 미래의 제 모습이라든지는 많이 떠올려보는 편인데, 생각의 끝에 집이나 동네는 늘 빠져 있더라고요. 언젠가 내 것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누려볼 수도 있겠다는 상상 자체를 못하는 편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저에게도 처음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느꼈던 곳이 있는데요, 바로 작년 연말에 방문했던 홋카이도의 오타루예요. 언어만 통한다면 정말 당장이라도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이었죠. 여행 마지막 날에 관광지로부터는 조금 떨어진 오타루의 주택가들을 걷게 되었는데, 눈이 무척 많이 내리는 그곳에 집집마다 거대한 제설 도구가 있더라고요. 현관에 놓인 그 도구들의 몸피와 몸피에 비해 조용한 그것들의 성정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곳 사람들이 눈과 맺고 있는 질서에도 마음이 끌렸습니다. 눈이 홋카이도만큼 많이 내리면 도로나 생활이 완전히 마비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미 그 정도의 눈은 그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라 생각보다 사람도 차도 잘 다니고요. 곳곳에 작은 화산과도 같은 눈덩이들을 쌓으며 길을 정비하는 질서도 인상적이었어요. 무엇보다 사람들이 정말 친절하고 추위 속에서도 그것을 잃지 않는 모습에 감동했어요. 택시를 타자마자 온도는 괜찮은지, 길이 미끄럽지는 않은지 물으시더라고요. 입구가 눈으로 뒤덮인 오전 수산 시장 사람들의 활기와 유리 공방 장인들도 기억에 남아요. 언젠가 일본어를 열심히 배워서 오타루 근방에 살아보고 싶어요. 집 앞을 쓸고,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떼어내는 제설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할머니로 늙어간다면, 엄청난 눈 속에서 기쁨과 상쾌한 고립감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다시 부암동으로 돌아가 살아보고 싶기도 해요. 물론 제가 살았던 집에서는 다시 살지 못하겠지만요.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을 품고 있는 그 근방에서 청장년의 시기를 보내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동네의 어느 곳을 걸어도 약간은 붕 뜬 채 꿈꾸는 기분일 것도 같아요. 흐르는 시간, 흘렀던 시간의 결 때문에 오히려 손 안의 사물처럼 축소되는 공간을 느끼게 될 것 같고요. 많은 기억들이 걸쳐져 있는 동네에 새로운 기억을 덧입혀가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이전 기억이 너무 강렬해 새 이야기는 씌어지지 않으려나 그런 것들이 궁금해지기도 해요.
김연덕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현대문학, 2025)
Q. 참, 몇 해 전 광주를 오가며 진행한 문학 강의의 수강생과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고 들었어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궁금합니다.
벌써 3년 반이 지났네요. 2021년 가을에 매주 광주에 내려가 문학 강독 수업을 진행했었는데요. 첫 시간부터 맨 앞에 앉아 눈을 빛내며 수업을 들어주시던 할머니가 계셨어요. 그리고 첫 수업이 끝나자마자 제게 와서 말을 걸어주셨죠. 수업 때 제가 지나가듯, 광주의 오래된 독립영화관인 ‘광주극장’이 궁금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분이 광주극장의 엄청난 매니아셨던 거예요. 광주극장에서 개봉된 영화는 거의 다 보시고, 하루에 두세 편도 연달아 보시는, 1년에 200편 이상의 영화를 보시는 굉장한 활력을 지닌 분이셨죠. 함께 광주극장에 가자고, 그렇게 첫 수업에 제게 제안해주셨고, 아마 그 다음 주엔가 그분과 영화를 보고 수업에도 함께 들어갔던 것 같아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은 수줍음이 많아 제가 영화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말을 걸지 못했을 것이라 하시더라고요. 나이도, 살아온 곳도 다른 그분과 저를 광주극장이 이어준 셈이죠.
그때의 인연으로 저는 지금도 1년에 적어도 두 번, 그분과 만나며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제가 광주에 내려갈 때도 있고 그분이 서울에 오실 때도 있지요. 광주에 내려갈 때마다 댁에 재워주시고, 아침밥도 꼭 차려주셔요. 광주에 방문했던 어느 무더운 여름, 그분 댁에 가던 길에 함께 수박과 생닭을 사갔고 그것을 다음날 아침 바로 요리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그분 덕에 광주는 저에게 제2의 고향 같은 도시가 되었죠.
Q. 공통점도 광주에 근간을 두고 있어서 더더욱 반갑게 느껴지네요. 시인님은 공통점과 지난 독립문예지 《공통점》 3호에 시를 발표하고, 온라인 문학 전시 프로젝트 〈공간과 자간〉으로도 함께하셨죠. 또 작년에는 낭독 공연 ‘포에틱-사운드-스테이지’에 낭독자로 참여해주셨습니다. 시인님께는 공통점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막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공통점과 함께 성장해온 기분이에요. 아직 첫 시집이 나오기 전, 불안하고 어설펐던 시절의 저에게 청탁을 주신 감사한 곳이자 단순한 문장들로만 구성되어있던 저의 시를 다양한 방식으로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곳, 소중한 사람과 추억을 기분 좋은 무게의 상자처럼, 고운 빛처럼 선물해주신 곳이지요. 앞으로도 공통점과 많은 시간들을 채워나가고 싶고요. 공통점과 저의 20대를 기쁘게 통과해왔는데, 함께할 30대나 40대, 그 이후의 시간들은 어떠할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참, 《공통점》 3호 발간 무렵이었나요? 그때 주셨던 수건, 지금도 집에서 잘 쓰고 있어요!
공통점과 함께한 낭독 공연 〈포에틱-사운드-스테이지〉에서 리허설 중인 김연덕 시인.
Q. 맞아요. 《공통점》 3호의 굿즈로 제작한, 소라게 로고가 그려진 수건일 텐데, 여전히 간직해주고 계시다니 감동입니다. 공통점과의 시간을 선물처럼 기억해주셔서 저희도 정말 기뻐요. 30대, 40대가 넘어서도 시인님의 글을 보고 싶은 애독자로서 시인님의 책 취향도 묻고 싶어요.
저는 50, 60년대생 작가들의 책을 특히 좋아해요. 앤 카슨, 메리 루플, 캐슬린 스튜어트, 다와다 요코 같은… 살아온 삶의 관록이 느껴지면서도 스타일을 잃지 않고 계속해 나아가는 작가들이요. 그들의 작품에는 온갖 절망과 실패, 그 안에서 때때로 믿을 수 없이 일어나는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순간들, 삶에 난 상처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의연함과 여전한 서툶에서 오는 당황스러움이 한꺼번에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삶 그 자체가요. 동시에 문장도 구성도 정말 새롭고 실험적이어서, 저에게는 그들의 작업이 오히려 젊은 작가들의 것보다 더 첨단의 것으로 느껴지거든요. 나이든 작가들의 이런 작업들은 저에게 큰 힘을 줘요. 신예들의 등장에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작업을 해내가는 작가들을 보면, 어쩌면 나도 나이가 들어서도 생생히 박동하며 존재하는 이런 글, 쓰는 사람에게 가장 시급한 현재인 글 그러니까 삶의 한가운데를 겨냥하는 이런 작업들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겨요. 그들이 작가 외적인 삶, 더 넓은 삶의 영역에서 복잡다단한 부분들을 용감히 겪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전율도 있고요. 몇 작품만 꼽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꼽아보자면, 앤 카슨의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플로트』, 메리 루플의 『나의 사유재산』, 캐슬린 스튜어트의 『투명한 힘』, 다와다 요코의 『목욕탕』 『태양 제도』를 꼽아보고 싶어요!
Q. 저도 앤 카슨을 좋아해서 괜히 기분이 좋네요! 낯선 책들이 많지만 시인님의 추천 도서라면 전부 다 읽어보겠습니다. 꽤 예전 일이이긴 한데, 시인님께서 인물 소묘화를 그렸던 걸 기억해요. 요즘에도 그려보는 것들이 있을까요?
기억해주고 계셨군요! 정말 기쁘고 감사하네요. 대학생 때 통학길이 꽤 멀어서,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가끔 여행 가면 해변이나 미술관에서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리곤 했어요. 짧은 크로키였는데요. 한 달에 서른 장, 마흔 장 이상씩 그렸을 정도니 그때는 그리기에 정말 몰두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게 그렸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아쉽게 아무것도 그리고 있지 못하답니다. 코로나 이후 지하철에서의 그리기를 멈추었고, 이후 저도 생활이 다른 것들로 너무 분주해지다 보니 그릴 생각을 못했었던 것 같아요. 언젠가 다시 그리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하고 있습니다.
김연덕 시인의 크로키. 2019년 2월, 런던 영국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그린 그림.
Q. 시인님의 그림과 시편들이 어딘가 닮은 것 같다는 생각도 문득 드네요. 다음으로 월간 사람책의 공통 질문인데요, 시인님과 ‘공통점’을 지닌 건 무엇일까요?
저와 공통점을 지닌 건… ‘플라스틱 초’예요. 첫 시집 출간 직후 초 선물을 정말 많이 받았는데요. 거의 다 각양각색의 향과 아름다움을 지닌 양초였는데, 그 중에서 건전지를 넣어 작동하는 플라스틱 초를 받았어요. 첫 시집 첫 낭독회 사회를 봐준 육호수 시인에게서요. 호수 시인은 촛대에 그 가짜 초를 켜두곤 사회를 봐주었는데, 플라스틱 불꽃이 모빌처럼 미세하게 흔들리며 공간을 밝혔던 순간이 떠올라요.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제 책장의 한켠에 자리를 지키고 있답니다.
호수 시인은 제게 그 플라스틱 초를 두 자루 선물해주었는데요, 하나는 건전지를 다 써서 불이 들어오지 않고 나머지 하나에만 불이 들어와요. 작동하지 않는 초에 새 건전지를 넣지 않은 건 물론 귀찮아서도 있지만, 그냥 그대로의 수명이 다한 기계 초를 보는 게 좋아요. 이미 한 시기는 지나가버렸고, 건전지를 넣는다면 그 순간을 다시 체험해볼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체험의 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는 녹아버리면 영영 되살릴 수 없는 양초가 더 맞닿기는 하지만, 다시 잠깐 살아났다고 착각되는 플라스틱의 순간이 저에게는 삶과 더 가까운 것으로 느껴져요. ‘시’라는 가짜 불, 거짓말 같은 불, 그럼에도 언제든 다시 밝혀지는 불을 밝히기 위해 몸을 가리고 있던 껍데기를 떼어내 건전지를 넣고 작동되는 순간들에서 저 초와의 공통점을 발견해요. 건전지를 넣고 빼는 과정에서의 ‘통점’도 함께 느끼고요.
시인이 꼽은 ‘공통점’, 플라스틱 초.
Q. 올해 활동 계획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어요.
세 번째 시집 출간 이후에는 아마 산문집 작업으로 조금 정신이 없을 것 같아요. 연재하고 있는 산문 외에도 계획되어 있는 산문집 출간이 있어, 올해는 시보다 산문에 집중하는 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 번째 시집은 아주 천천히 준비해보려고요. 지치지 않기 위해 시와 산문의 구분을 엄격히 두기보단, 크게 보면 이어져 있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해나가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Q. 시인님의 산문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기대하고 있을게요! 마지막으로, 이 사람책 대화를 읽게 될 독자분들께 전하는 메시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한낮에는 이제 봄볕이 들기 시작하네요! 아직 바람이 조금 차갑고 때때로 비가 내리기도 하지만, 읽어주시는 분들의 일상에 곧 찾아들 크고 완전한 봄을 저도 함께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름답지만은 않은 삶 가운데 그럼에도 분명히 아름답게 찾아드는 것들을 오래 누리시면서 첫 계절을 보내시기를 바라요. 끝으로 시시콜콜하고 기나긴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았던 것 같기도 해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에는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실래요? 우리 또 만나요.
오타루 토미오카 성당에서 사온 성물.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여행의 기억을 남기고 싶어 늘 가방에 달고 다닌다.
작업하러 자주 가는 숙대 입구의 카페 ‘우모에’. 정갈하고 과묵한 목재 테이블이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