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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속 씨앗


만난 사람: 정윤주(시각예술가)

묻는 사람: 김조라


‘월간 사람책’은 공통점 안팎으로 정독하고 싶은 ‘사람책’들을 만나는 대담 기록입니다. 물음과 응답 속에서 사람들이 지닌 공통점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네 번째 사람책으로, 본인이 원하는 장면에 맞춤하는 매체를 탐구하고 연구하며, 여러 예술 장르를 넘나들고 통합하는 정윤주 시각예술가를 읽어보았습니다.


Q. 정윤주 작가님, 안녕하세요! 공통점의 네 번째 사람책으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독자분들께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시각예술가 정윤주입니다. 평면, 조각, 설치와 같은 시각 언어로 장면이나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은 운율과 서정, 구조와 배열 같은 것들에 대해 고민하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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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설치 중인 정윤주 작가의 뒷모습.

Q. 부산 망미동의 작은 골목 안 회관에서 작가님을 처음 뵈었던 날이 기억나네요. 2019년에 개관한 현대미술회관이 안식기에 접어든 지도 벌써 1년여가 되어가는데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현대미술회관을 운영하면서 총 42개의 행사를 진행했어요. 동시에 고등어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일도 해왔고요. 회관 운영과 디자인 일을 하면서도 어떤 목표가 있었다기보다는 한 작가를 조명하는 일에 흥미를 느껴서 개인 작업과 병행해왔었거든요. 그렇게 벌써 5년이 지났더라고요. 이쯤이면 개인 작업에 몰입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싶어서 회관과 디자인 일은 잠시 쉬어가고 현재는 긴 호흡의 개인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요즘은 연구 결과를 내지 못하는 연구원처럼 여러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실패를 거듭하고 있어요.

 

Q. 작가님의 자취를 따라가 보면 조각뿐만 아니라 정말 다양한 작업을 하시잖아요. 회화나 디자인 작업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책을 만든다거나 목공이나 도자를 하는 것들이요.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장르를 막론하고 관통하는 감각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업을 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있으신가요?

나는 왜 이렇게 여러 가지에 관심이 가고 기웃거리게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결국 중요한 건 매체를 내가 원하는 장면에 맞게 계속 탐구하고 연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보고 탐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때로는 낯선 것들을 연구만 하다가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들도 많지만 그게 작업을 하는 이유와 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작업에 있어서 그것만큼 중요한 게 또 있는데…작업복입니다. 지난해 가을에는 패션포토그래퍼 빌 커닝햄이 구멍이 나서 다 해질 때까지 챙겨입는다는 르몽생미셸의 파란 자켓을 중고로 구매했어요. 아주 고가의 옷을 산 것이었는데 그도 그럴 게 1년 365일 중 경조사를 제외하고는 작업복만을 입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괜찮은 투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업복을 입는 것은 작업의 능력을 두 배 가까이 올릴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죠. 
겨울의 끝자락이니까 동절기 작업복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요, 메인 작업복은 두 개로 A를 빨 때 B를 입고 B를 빨 때 A를 입는 식이에요. A는 10여 년 전 동료가 사준 오버롤로 베이지색에 상체는 니트, 하체는 탄탄한 면 소재로 되어 있는데 가슴에 연필을 꽂을 수 있는 주머니가 있어 작업할 때 용이해요. 바지에는 아크릴과 유화물감, 각종 수지, 오일 등이 알록달록 시간과 함께 쌓여있는데 그 얼룩이 생겨난 모양이 예뻐서 낡았지만 버릴 수 없게 된 옷이에요. 마음에 드는 작업복은 얼룩이 묻을 때도 최대한 예쁘게 묻히(?)려고 노력합니다. 일체형이라 바지가 흐를 일이 없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작업하는 일이 많은 날에 특히 선호해요. 인터뷰에 답하며 제가 가진 작업복들을 떠올려보는데 어쩐지 다 빛바랜 톤이네요. 새로 샀다는 파란색 자켓도 실은 물이 빠지고 닳은 모습에 반해 구매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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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지색 오버롤 작업복A.

Q. 작업복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대답인데요? 그렇지만 작가님의 작업복을 보니 납득이 갑니다. 멋진 옷이에요. 이어서 작품에 대해 여쭙고 싶은데요, 작가님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말보다도 더 정확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작가님의 작품들을 보며 정면으로 보는 것(〈Still Life〉, 〈Industrial Variation〉)과 측면으로 보는 것(〈Water Tower〉, 〈21g in Box〉)이 있다고 느껴졌거든요. 외로운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사사로운 것의 분명함과 틈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측면의 장면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데요, 작가님이 만들어내는 작품관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몇 년 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보았던 김종학 작가님의 개인전이 떠오릅니다. 특히 저는 ‘겨울시리즈’를 좋아하는데요. 작가님의 색채감 넘치는 작업들도 물론 좋지만, 마른 땅과 풀, 나무 위로 하얀 눈이 덮힌 겨울의 풍경이 너무도 인상 깊었지요. 작가가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며 아크릴 물감과 유화 물감의 물성을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 붓이 지나간 자리를 보고 있자면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얼마나 표현하고자 했는지 그런 것들이 너무도 온전하고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몇 번이고 그림 앞에 되돌아가 멈춰 서기를 반복했었어요. 그런 그림은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은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이야기를 가지는 경우도 있겠지만요. 겨울의 풍경을 보았고, 보는 것을 그대로 아니 어쩌면 가감하여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 여기서 적절하다는 것은 완전한 것에 가까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걸로 이미 너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작업에 대해 여쭈어주셨는데 다른 작가님의 이야기만 많이 한 것 같지만,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은 그런 종류의 작업과는 조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은 작업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대신에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그 말을 시각적인 장면에 비추어 전달하는 시도를 거듭하면서 저만의 방식을 체득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21g〉 시리즈를 떠올려보면 선별한 색상으로 만들어진 21개의 블록이 정갈하게 쌓인 설치 방식이 시각을 통해 먼저 들어오고, 작품에 다가서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향기를 느끼고, 쌓인 블록이 비누인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육면체의 비누는 각각 21g으로 한 사람의 영혼의 무게를 가지고 있고요. 선별한 색상 역시 각각 누군가의 인격과도 비슷한 것으로 앤 카슨의 『짧은 이야기들』에 나오는 시각적 문장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스치듯 관람해도 무관하지만 이렇게 하나씩 의미를 파악해 가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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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er Tower I, II: Side Table and Stool〉작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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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g에 대한 짧은 이야기〉작품 사진.
Q. 듣고 보니 작가님에게 있어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뷔페뷔페》에 수많은 이야기들을 연재하기도 하셨고요. 글을 다루는 저로서는 《뷔페뷔페》가 작가님의 세계관을 더 넓게 이해해 볼 수 있는 창구이기도 했거든요.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단연 〈모형을 위한 모형을 위한 모형〉이에요. ‘모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보편적으로 모형을 만드는 것은 큰 것을 작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 역시도 커다란 작품을 시험해 보고자 작게 만든 것이 그 시작이었어요. 하지만 모형은 실물보다 작거나, 크거나, 같을 수 있습니다.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를 찍기 위해 우주를 가상 모형으로 작게 만드는 것이 작은 모형의 예시일 수 있고, 세포의 원자를 실제 크기보다 수백만 배 더 큰 모형으로 만들어 수천수백 가지 실험 결과와 정보를 집대성할 수도 있는 것이 큰 모형의 예시, 하나의 가구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소재를 선정하기 위해 다양한 소재를 사용한 1:1 모형을 만드는 예시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를 파악할 수 있고, 경험하기 어려운 것에 접근할 수도 있고, 이해가 부족한 부분을 깨닫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이나 개념을 구체화할 수도 있는 것이 모형이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모형을 만드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모형을 만들기 위한 또 다른 모형을 만드는 단계를 거듭하며 단지 ‘최종’을 위한 ‘단계’로서의 모형이 아닌, ‘모형’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요. 저는 우리의 일상이 꽤 많은 모형 만들기의 연속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해요. 다이어리에 한 달, 한 해의 계획을 쓴다거나, 중요한 발표를 하기 전 목소리를 내어 연습하는 일도, 소중한 사람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음식을 미리 연습해 본다거나, 하다못해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워보는 일까지도 모두 유무형의 모형을 만드는 일로 여겨져요. 모형을 만들어가는 동안만큼은 부족한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고 마음껏 실패해도 좋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현상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도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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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에 스케치한 모형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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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주 작가가 만든 모형.
Q. 듣고 보니 저도 매일 머릿속으로 무형의 모형을 만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고 퇴고하는 일도 모형의 일종이고요. 《뷔페뷔페》에는 작가님이 수집한 수많은 작가의 글과 작품도 함께 담겨 있는데요, 문학이 참 많더라고요. 평소에 어떤 책을 즐겨 읽으시나요?

 평소에 좋은 글을 보면 너무 좋아서 계속 다시 꺼내 읽고, 옮겨 적기도 하고, 목소리를 내서 읽기도 하거든요. 아니면 좋아하는 친구 생일이라거나 무언가를 선물할 때 같이 써서 준다거나 하는 것들도 좋아하고요. 《뷔페뷔페》를 쓰던 때는 슬픔이 많은 시기였어요. 그래서 시가 너무나도 잘 읽혔어요. 물론 제가 시의 구조나 기법 같은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독자는 아니지만 그때는 아무튼 코에 바람만 스쳐도 내가 시를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상태였달까요. 읽다가 마음에 닿은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더 좋아하려고 남기다 보니 점점 많아지더라고요. 요즘은 작업에 관련된 것 말고는 잘 읽지 않고 있다가 최근 친구와 둘이서 독서모임을 시작하면서 미뤄둔 고전들을 읽어 나가고 있어요.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과 알베르 까뮈의 『소송』을 읽고는 정신이 그만 아득해져서 세 번째는 제발 덜 어려운 책을 읽자는 결론에 도달해 존 버거의 『A가 X에게』를 읽었어요. 이야기를 세심하게 뜯어 먹으며 뭔가 마음이 채워지고 보돌보돌해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Q. 작가님이 《뷔페뷔페》에 옮겨놓은 글들이 작가님의 작품과 닮아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김복희 시인의 「잃기」나 안희연 시인의 「선잠」, 황인찬 시인의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말차」 같은 것들이요. 어쩐지 쓸쓸한 이야기면서도 눈물 찔끔 나는 귀여운 구석이 있달까요. 외롭지만 가벼워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요.

저도 언제나 조금은 가볍고, 귀여워지고 싶나 봐요. 실은 저는 빛바랜 것, 물 빠진 것, 낡게 해져서 부드러워진 것에 마음이 가요. 입던 옷을 입고 또 입으면 닳아서 가로와 세로로 엮인 직물의 모양이 드러나는 것처럼 들여다보면 있는 것들이요. 저 시들을 읽으면 요만큼을 표현해도 사실 그 안에는, 그 뒤에는 커다란 무언가가 있다는 게 느껴지잖아요. 쓸쓸함까지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아주 잘 담긴 시들을 보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Q. 작가님의 전시 《구조로 쓴 시》를 보면 작게는 조각의 조합에서 크게는 작품의 배치를 아우르는 모든 것을 의도된 자리에 놓음으로써 정확한 표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이런 작업이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만들어 하나의 글을 쓰는 일과 다르지 않더라고요.

맞아요. 글을 쓰는 친구를 보면 발견한 단어나 재미난 문장 같은 것들을 메모장에 모아두더라고요. 시각적으로 풀어나가는 작업도 그렇거든요. 길을 걷다가, 책을 읽다가, 무언가를 보다가 인상적인 장면을 만나면 얼른 노트에 스케치해요. 형태적으로 확 끌림을 느끼는 덩어리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 잊지 않도록 기록하는 거예요. 사진을 찍을 수도 있지만 사진은 너무 많은 부분이 정확하게 담기기 때문에 내가 어떤 부분에 매료되어 이걸 남기고 싶어 했는지 잊어버릴 때도 많더라고요.《구조로 쓴 시》는 실제로 시의 구조를 많이 떠올리며 한 전시예요. 하나의 작품에 여러 가지 조각들이 놓여있는데, 하나의 조각이 하나의 역할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각각 만들어 놓고 문장을 짜는 것처럼 배치했어요. 뾰족한 것 위에 둥근 것을 올리면 불안감이 만들어지고, 넓적한 것에 넓적한 것을 올리면 안정감이 생기잖아요. 긴장된 것과 느슨한 것을 배치하며 동시에 그 안에서 수직과 수평을 만든다거나 하면서요. 강약을 조절해 가면서 제가 의도한 장면을 만들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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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구조로 쓴 시》의 작품 모음 사진.

Q. 의도한 장면을 만드는 시각적인 방법이 문학에서 시도하는 방법과 본질을 같이 한다는 게 새삼 신기합니다. 그럼 언제나 노트를 가지고 다니시겠네요.

몰스킨 노트를 사용한 지 오래됐어요. 몰스킨이라는 노트가 굉장히 많은 작가들이 사용했던 역사가 있는 노트이기도 한데, 이 노트 종이의 평량이라거나, 커버가 가진 견고함의 정도라거나 규격이라거나 또, 메모했을 때 뒷면에 비치는 농도라거나 펼쳤을 때 쫙 펴지면서도 낱장이 떨어지지 않는다거나 하는 그런 특성들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펜은 보통 잉크펜을 선호하는데 번지지 않으면서도 볼펜보다 세밀한 시그노 0.38을 가장 많이 씁니다. 물론 늘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라 냅킨이나 자투리 종이에 급하게 메모할 때도 많이 있어요.
 
Q. 2023년에는 공통점 멤버인 김조라 시인과 함께 광주에서 전시 《미끄러진 자리에서 또 미끄러진다》를 열었어요. 두 분은 어떻게 서로 알게 되셨는지, 또 어떤 작품을 전시했었는지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2022년에 우연히 5·18 시 프로젝트 〈5월을 기리는 글자들〉을 보고 공통점의 이서영 시인과 김조라 시인을 알게 되었어요. 그 당시 현대미술회관과 고등어디자인을 활발하게 운영하던 때라 5월을 잘 기억하며 전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차였거든요. 그렇게 인연이 닿아 2023년에 김조라 시인과 함께 광주에서 전시까지 하게 되었죠.《미끄러진 자리에서 또 미끄러진다》는 네 명의 시각예술작가가 김조라 시인의 연작시 두 편을 읽고 자신의 작업으로 재구성하는 전시였는데 저는 비누로 작업을 했어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오거든요. ‘홀딱 벗고 몸을 씻는 거야 / 좋은 냄새가 나는 좋은 비누로’. 이 구절을 읽고 한 사람 분량의 향기가 나는 덩어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비누로 이런저런 실험을 했죠. 던칸 맥두걸의 ‘21g 실험’을 떠올리며 비누 영혼의 무게를 가늠해 보는 작업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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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21g〉의 비누향을 맡고 있는 관객들.

Q. 저는 이때의 작품들에서 집요함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정육면체의 비누가 반듯하게 정렬되어 쌓인 모습이라든지 21g 비누 조각에 맞춰 정확한 규격으로 디자인된 패키지 같은 것들에서 말이죠. 그러고 나서 작가님의 작업실을 보니 자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자는 제가 참 좋아하는 도구 중 하나예요. 자 이야기를 하자니, 자는 단연 대한민국이 맛집이란 걸 아시나요? 코메론 줄자가 그 기능을 인정받아 세계적으로도 판매가 많이 되고 있고 랭킹에 들어간다더라고요. 디자인은 아쉬운 감이 있지만 줄자를 길게 빼내어 한 손으로 벽의 거리를 잴 때 안정적인 곡률로 꺾이지 않는 힘, 매끄러우면서도 정확한 스토퍼 기능 등 아주 멋지게 기능을 수행하는 자입니다. 자들은 저마다 각자의 역할을 달리 수행합니다. 어떤 친구는 섬세하고 어떤 친구는 불안정해요. 자라는 기준이 제시되면서 우리는 길거나 짧음, 두껍거나 얇음을 판단하고요. 특히 이 자를 종이에 밀리지 않도록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에 연필을 쥐고 선을 긋는 일을 좋아합니다.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 자에 대고 적당한 속도와 힘의 강도를 지키려 노력하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선을 긋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오차가 생기지 않을 것 같지만 흑연의 물성이 속도를 가지고 미끄러지며 두께가 두꺼워지거나 1㎜ 이하로 미묘하게 오차가 생기기도 해요. 자라는 도구가 정확함이나 정밀함을 주는 것 같지만 실은 정확하기는 불가능에 가깝고 정확해지려는 노력을 도와주는 도구라는 점에서 참 좋아요.
 
Q. 자에 대해 이렇게 긴 이야기를 듣기는 처음이에요. 굉장합니다. 언젠가 자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인터뷰를 꽉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재밌어요! 요즘은 어떤 작업들을 하고 있으신가요? 계획된 활동이 있다면 독자님들께 살짝 알려주셔도 좋고요.

6월에 서울에서 예정된 개인전 《숨겨진 질서의 사고 실험(가제)》을 준비하고 있어요. 2024년 4월,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해 3개월간 유럽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일상을 기록했어요. 쉬는 것이 목적인 여행으로 시작했으나 낯선 장소에서의 생활이 새로운 영감을 일으켰던지 자꾸만 작업에 대한 고민들이 이어졌죠. 작업에 관한 생각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몇 가지 대책 행위로써 사용한 돈을 모두 기재했어요. 1센트도 남기지 않고요. 가능한 한 영수증도 모았지요. 사용한 돈은 교환한 가치의 척도가 되어 기록으로 남겨졌습니다. 
그렇게 기록된 가치들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유로 통화의 형태는 사각형, 원형, 동전 옆면의 두께와 길이를 측정해 그린 얇은 직사각형, 여러 개의 동전을 쌓은 면적을 측정해 그린 정사각형에 가까운 사각형, 동전이 한 바퀴 굴렀을 때의 지름과 두께를 측정하여 그려진 띠의 형태 등으로 도형화되고, 도형화된 형태는 각각의 색채를 가지게 되고요. 지금도 한창 실험 중에 있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지만…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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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작업 중인 신작의 귀퉁이가 보이는 정윤주 작가의 작업실.
Q.요즘은 개인전 준비로 바쁘시겠군요. 6월에 개인전 보러 가겠습니다.(진짜로요) 월간 사람책의 공통 질문인데요, 작가님과 ‘공통점’을 지닌 건 무엇일까요?

“몇 주 전부터 두 번의 짧은 멈춤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고독은 마침내 밀폐되고 나는 과일 속의 씨앗처럼 작업 속에 있습니다.”
친구가 책을 읽다가 저를 닮았다면서 비둘기처럼 날라다 준 부분인데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저런 말을 했더라고요. 친구랑 이 과일은 분명 사과일 거야, 사과가 아닐 리 없어, 하면서 웃었는데 이 질문을 들으니 ‘과일 속의 씨앗’이 떠오르네요. 요즘엔 정말 혼자 작업실에서 씨앗처럼 작업만 하고 있거든요.
 
Q. 마지막으로, 이 사람책 대화를 읽게 될 독자분들께 자유롭게 한 말씀 부탁드리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서효인 시인의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시집 발문을 정용준 소설가가 썼는데요. 사실 시집 발문이나 해설은 유심히 읽는 경우가 드문데 이상하게 그 글은 잘 읽히더라고요. 그 글 말미에 나온 문장이 좋아서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때 언제나 그 문장을 가져와 인사말을 보내고 있어요. 독자님들께도 전합니다. 여러분의 아침과 저녁 꿈과 무의식이 건강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시인아. 친구야. 평생 시를 쓰고 책을 만들겠다 다짐한 사람아. 너의 아침과 저녁, 꿈과 무의식이 건강하기를 기도한다. 기도하는 자들은 하루 끝에 하얀 몸과 투명한 마음으로 잠드는데 쓰는 자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붉게 물들고 까맣게 타들어 갈까. 시를 쓰면서 왜 시를 쓰고 싶어 하는 걸까. 이미 시면서 왜 시가 되고 싶어 하는 걸까. 그러나 나는 알아. 시가 되기 위해 애를 쓰는 시가 시고 그 시를 붙잡고 애를 쓰는 자가 시인이라는 것을.
―정용준, 서효인 시집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문학동네, 2022)의 발문 「이야기의 바깥으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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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 구매한 미네르바 타원 템플릿 No. 44. 3종(15°, 45°, 30°)
유연하면서도 견고하다. 선명한 오렌지색의 대비로 형태를 정밀하게 인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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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걸어야 겨우 숨쉴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오면 
동네 수영강 옆이나 뒷산인 배산을 무작정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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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사람
김조라

시와 짧은 소설을 쓴다. 효천로를 지날 때 임암교에 서서 대촌천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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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 joraakim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