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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기 직전까지 분명히 빛나던


만난 사람: 이선미(시각예술가)

묻는 사람: 이서영


‘월간 사람책’은 공통점 안팎으로 정독하고 싶은 ‘사람책’들을 만나는 대담 기록입니다. 물음과 응답 속에서 사람들이 지닌 공통점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열두 번째 사람책으로 의도치 않게 조우하는 불쾌한 감각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직시해 하나의 완전한 이미지로 표출해내는 시각예술가 이선미 작가를 읽어보았습니다.


Q. 안녕하세요, 이선미 작가님. 공통점의 기획을 통해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연말에 나누게 된 이 대화가 기쁩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화를 전공하였고, 주변을 이루는 풍경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감각에 주목하며 그 속에서 포착된 사라지고 잊혀가는 대상들을 재조명하고 재구성하는 채색 작업을 하고 있는 이선미라고 합니다. 간헐적으로 일러스트 기반의 디자인 작업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대학교 졸업 후 광주에 정착해 어느덧 10년째 광주에서 생활하고 있네요. 주말에는 광주극장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Q. 작가님께서는 한국화를 기반으로 한 시각예술 작업을 이어오고 계시지요. 전통 회화의 매체성과 감각이 작가님의 작업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화’라는 명칭은 때로 특정한 장르의 규정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작가님은 그 이름 안에서 무엇을 지키고, 또 어떠한 특성을 벗어나고 싶으신지도 함께 듣고 싶습니다.
 
한국화라는 명칭은 단순히 제가 졸업한 학교의 학부 정식 명칭이라 자연스럽게 언급하게 되는 부분이 있지만, 제 작업은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주제나 채색 안료, 재료를 다루는 고유한 방식들을 철저히 지키며 작업하고 있지는 않아요.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 속에서 저와 잘 맞고 좋아하는 지점들을 선택적으로 접근하며 채색 작업을 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종이에 스며드는 느낌과 부드럽게 발색 되는 고유의 물성이 좋아서 채색 작업을 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재료와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시작하기 전의 마음가짐이나 차분하게 작업을 준비하는 사유의 방식, 예민한 종이를 정성스레 붙이는 과정, 아교반수라는 채색을 위해 실패하지 않는 밑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교반수를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리며 반복되는 시간들 속에서 숨 고르기 하듯 도약을 기다리는 시간들을 좋아해요. 작업을 준비하는 루틴은 어느 정도 정돈된 것 같은데, 아직 장르의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아직 질리도록 열심히 그려 보질 못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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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미 작가의 작업실 풍경.

Q. 그렇군요.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회화적 이미지, 특히 손으로 만들어가는 작업을 직접 진행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에서 소중한 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길을 꾸준히 걸어 나가는 것은 작가님께 어떠한 의미입니까?
 
단순히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창작이라는 행위에 대한 쾌감이 있는 것 같아요. 흰색 바탕 화면 위에 손 하나, 붓 하나로 즉각적인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정직한 영역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느끼는 시시각각 다른 감각들이 일상생활에서는 접할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의 지점들이어서 계속해서 작업할 수 있는 동력이 되어 주기도 하고요. 가능만 하다면 오래오래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Q. 광주극장이라는 일터에서 처음 만나게 된 이후로,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요. 가까운 곳에서 작가님의 작업과 생활을 지켜볼 수 있어 매우 감사했던 날들이었고요. 이는 단순한 협업을 넘어, 특별한 공간을 함께 살아낸 동료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축상점 기획, 시민들과 함께하는 간판학교 워크숍, 〈상영관〉 프로젝트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을 진행해 오셨는데요. 극장이라는 장소는 작가님의 작업 감각이나 시선에 어떤 변화를 주었을까요?
 
사람으로서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감정과 감각이 확장되고 있음을 체감했던 것 같아요. 극장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저는 그저 ‘매표 직원’이라는 수행적 역할, 마치 NPC 캐릭터 같은 존재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며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다정함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많은 기회를 주셨어요. 광주극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머무르며 자연스레 쌓인 애정과 관심은 창작으로 이어졌고, 제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늘 좋게 바라봐 주시고 응원해주신 덕분에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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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극장의 간판을 그리는 이선미 작가의 뒷모습.

Q. 간판학교에서 박태규 작가님과 함께 코디네이터로 참여하신 경험도 인상 깊습니다. 간판이라는 매체는 회화와 디자인, 노동, 공동체성 등 다양한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지요. 이 경험이 작가님께 어떻게 남았는지도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극장에서 시민들이 참여하는 손간판 프로그램이 있구나 싶어서, 미술 전공자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참여해 봐야지, 하는 막연한 관심으로 시작했어요. 그러다 2023년, 시민간판학교 7기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저는 한국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제 주 전공은 아니었지만, 미술을 전공했다는 점과 광주극장 스텝이라는 중간자로서의 위치 덕분에 자연스럽게 오지랖(?)을 부리게 됐어요. 참여자분들과 극장, 그리고 박태규 선생님 사이에서 매니저처럼 조율하는 역할을 맡게 된 거죠. 이후 좋게 봐주신 덕분에 해마다 맡는 역할이 조금씩 늘어났고, 올해는 광주극장 개관 90주년이자 시민간판학교 1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에, 영광스럽게도 개막작인 〈미스터김, 영화관에 가다〉(2025)의 영화 간판을 그리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매년 이렇게 특별하고 귀한 기회를 주시는 데에 대한 감사함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가진 역량에 비해 책임져야 할 영역이 커지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도 하게 돼요.
주변에서 가끔 박태규 선생님의 뒤를 잇는 후계자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손사래를 치며 한 발짝 물러서게 돼요. 대신 요즘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건, 영화 선전 간판이라는 사라져 가는 장르 자체에 대한 관심이 이해하면 할수록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에요. 해마다 간판실에 앉아 직접 겪어보지 못한 당시 영화관의 부흥기를 상상해 보곤 하는데, 간판실에 남아 있는 옛 개봉작 간판들 속 주연 배우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저를 잊지 말아 주세요” 하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빠르게 흘러가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시간들을 감지할 때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돼요. 무엇이든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마음으로요.
 
Q. 그렇군요. 극장뿐만 아니라 작업실, 전시장, 그리고 다양한 카페에 이르기까지 작가님께서 아끼는 마음으로 자주 찾게 되시는 공간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러한 공간들은 작가님의 기억에 어떤 질감으로 남아있나요?
 
공간을 이루는 요소들이 주는 길든 안정감이 좋아요. 불편한 공간에 오래 머무를 수 없듯이, 내가 앉을 수 있는 편안한 의자가 있고 눈길을 오래 끄는 손때 묻은 물건들이 자리 잡은 공간. 공간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비슷하게 닮아 있어 이질감 없는, 편안한 곳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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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미 작가가 오랜 시간 함께한 광주극장.

Q. 작가님께서 작업을 시작하시게 만드는 결정적인 신호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작동할까요? 가령 특정한 경험이나 감정과의 조응, 이미지의 구조와 색의 흐름에 대한 포착과도 같이 다양한 배경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의도치 않게 조우하는 불쾌한 감각들. 너무 흔하고 원초적인 발상이자 근원이지만, 아름다운 자연을 오롯이 감상하고 좇는 시선 끝에서 뜻하지 않게 어떤 존재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뒤따라오는 불편한 감정들이 파생되며 시작된 것 같아요.
쥐를 잡기 위해 설치한 쥐덫에 의도치 않게 걸려 불운한 죽음을 맞이한 존재로부터 시작됐던 것 같아요. 끈적이는 덫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는 생명의 온기와, 처절한 몸부림을 대변하듯 끈끈하게 뒤엉킨 잔해의 깃털들을 직면했던 찰나의 순간 속에서 죄책감과 안타까움, 그리고 체념과 부질없는 애도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쳤어요. 인간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린 생명.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라는 이름 아래, 생명의 생과 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이 과연 옳고 타당한가. 내가 느꼈던 이 불편하기 그지없는 감각들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직시해 하나의 완전한 이미지로 표출해 냈을 때, 나는 비로소 이 불편한 감각으로부터 조금은 해방될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중이에요.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저 스스로 경각심을 가지려는 마음이 컸었는데, 지금은 조금이라도 저와 같은 지점의 불편함을 자각하고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바라봐 주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Q. 한국화, 혹은 회화 작업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작가님의 형식이나 색, 리듬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선호하시는 방식이 있다면 무엇일지도 궁금합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인간의 욕심으로 이루어진 아름답게 가꾸어진 풍경, 불필요해진 존재들이 제 그림을 이루는 요소인 것 같아요. 누구나 바라는 부분이겠지만, 제 그림을 보는 분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자유롭게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기를 바라요. 제가 다루는 이야기는 조금 무겁고, 개인적으로도 꽤 깊은 감정에서 출발한 이미지들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주제와는 반대로, 작품 속 색감은 오히려 채도가 높은 편이에요. 물론 시선을 끌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보다는 생명이 소멸되어 가는 시작점에서 조금이라도 붙들어 두고 싶다는 저만의 애도 방식이 담겨 있어요. 총천연색이 완전히 흐려지기 직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화면 속에 담고 싶다는 마음에서요. 생명이 소멸되는 순간부터 색은 점점 바래가지만, 소멸되는 존재들의 찬란했던 총천연색의 시간들을 그림 안에 머무를 수 있게 남겨두고 싶었어요. 사라짐 이후의 공허함보다는, 사라지기 직전까지 분명히 빛나던 존재의 흔적에 시선을 두고 기억하고 싶었고, 그 찰나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채도 높은 색을 사용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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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미 작가의 작품, 〈악취의 근원〉(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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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미 작가의 작품, 〈그저 운이 나빴을 뿐〉(2023)

Q. 선미 작가님의 몇몇 작품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변이네요. 월간 사람책 공통 질문드릴게요. 작가님과 가장 비슷한 ‘공통점’을 지닌 것은 무엇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산보(步). 가까운 곳을 천천히 거닐며 주변을 살피는 일. 저는 걷는 걸 좋아해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계절의 변화나 공기의 온도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드는 기분이 들어요.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걷다가 문득 마주치는 풍경들이 저에게는 작은 선물처럼 느껴져요. 길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모두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니까요.
 
 
Q. 마지막으로, 작가님께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방향이나 행보가 있다면 어떤 곳일지 궁금합니다. 작업의 길을 말씀해 주셔도 좋고, 작가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행복의 방식에 대해 말씀해 주셔도 좋습니다.
 
지치지 않고 긴 호흡으로 오래오래 작업할 수 있기를. 스스로의 작업에서 그치지 않기를. 나를 갉아먹지 않는 방식으로 깊이 있게 사유하며 돌아볼 수 있기를. 소중한 사람들과 건강하게 오래오래 웃으며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염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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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오롯이 담을 수 있다는 것, 구례 '천개의향나무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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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코코처럼, 자주 가는 카페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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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사람
이서영

광주 출생 및 거주. 장르적 구분에 갇히지 않는 글쓰기를 지향하며 공통점과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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