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직업이 없었다. 돈도 없었지만 조금 비참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조금 비참하고 조금 참으면 괜찮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진 않았다. 무엇이든 해봤으나 운이 없었다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생각했다.아무것도 아니면서 자존심은 세서 아무 일이나 하면 됐는데 그럴싸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언젠간 그럴싸한 일을 하는 자신을 꿈꾸며 자신을 모종의 예술가로 여겼다. 삶이 왜 나아져야 하냐고? 이상한 개똥철학을 가지며 믿으며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너무 많이 취하면 저런 소리나 해댔다. 삶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었지만 삶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고 별다른 도리 없이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삶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그저 하루하루를 외면했다. 술버릇은 점점 고약해져 친구들도 하나둘씩 그를 떠나갔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도 못 가고 아무것도 못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애인도 결국 떠나갔다. 나이는 찰 만큼 찼는데 돈도 없고 개똥철학만 남은 그는 아직도 그럴싸한 삶을 놓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무 데도 떠나지도 못하고 어느 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유령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유령이 되었다
유령은 밖을 떠돈다
아무도 보지 못하고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유령은
세상을 떠나지도 못하고
세상에 갇혀서
유령이 되었다
이제 사람이 아니어서 괜찮은 거 아닌가?
이제 아무것도 아닌 유령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며 믿으며
밖을 떠돈다
유랑한다
이제 아무것도 아닌 유령은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주변 사람들만 맴돈다
이제 죽었으니 삶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아무것도 아닌 유령은 그런 생각을 한다
유령이어서 삶을 생각할 필요 없다
삶이라 할 수 있는가?
유령이어서
그렇다
유령이어서
유령
Nobody
sjxkfk
2020
시, 15행에 791자. 오직 타자만이 답을 알 수 있는 질문, "지금 내가 살아 있나요?"
Poem, 15 line and 791 type. The question that only others can answer, "Am I alive now?"
ㅇㅕㄴㅍㅣㄹ
연필을 쓴다. 연필을 깎는다. 연필은 부드럽게 깎인다. 연필을 최대한 가늘게 깎는다. 연필은 소모된다. 연필은 깎을수록 작아진다. 연필은 부드럽고 최대한 가늘게 깎이며 소모된다. 연필로 무언가를 쓴다. 연필이 부드러워서 자꾸만 무언가 쓰고 싶다. 연필이 부드러워서 자꾸만 무언가를 쓴다. 연필이 부드러워서 자꾸만 무언가를 쓴다라고 쓴다. 연필은 쓰면서 소모되고 부드럽다. 연필은 쓰면 쓸수록 짧아진다. 그렇지만 연필은 쓸 수밖에 없다. 연필이 사라질 걸 알면서도. 연필을 쓸 수밖에 없다. 연필은 몽땅하다. 연필은 소모되고 더 짧아진다. 연필로 연필을 쓴다. ㅇㅕㄴㅍㅣㄹ. 연필은 연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연필은 결국 사라진다. 연필은 이제 없다. 이제 연필이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쓸 수 없다. 연필은 이제 연필이 아니다. 연필이 사라졌다. 이제 연필로 연필을 쓸 수 없다. 연필은 연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라진 연필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무도 모른다. 연필을 쓴다. 연필을 깎는다. 연필은 부드럽게 깎인다. 연필로 연필을 쓴다. ㅇㅕㄴㅍㅣㄹ.
ㅇㅕㄴㅍㅣㄹ
p-e-n-c-i-l
sjxkfk
2020
시, 1행에 408자. 쓰다 보면 지워지는 것들.
Poem 1 line and 408 type. Disappearing things during writing.
luca0worl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