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오후, 햇볕이 나를 학습하는 시간에
상상한다. 상상은 상상이라서 안과 밖이 함께 있다.
1. 반복되는 나무가 있어 숲을 이루는 방식
하늘을 가리는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몇 줄기 햇살이 영원처럼 비치고
영원이란 건 네가 거기 있어도
없는 것처럼 계속
계속 이어진단다.
혼자 있으면 너는 너에게서 없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지.
그 기분이 너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지.
반복되는 나무
숲을 이루는 방식
올려다 봐봐,
나뭇잎이 무성하다. 너는 이 숲에 혼자 있어.
그리고 너 거기 있는 게 보여.
2. 혼잣말은 혼잣말로
혼잣말하는 사람을 보면 혼자 혼잣말하게 둔다.
나는 망치고 싶지 않아. 혼잣말의 기분을.
혼잣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함께 있는 안과 밖을.
돌아오지 않는 답을.
답 없는 오후
햇볕이 나를 학습하는 시간
가끔은 끔찍하게 길고
가끔은 순식간에
나를 훑고 지나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혼잣말도 혼자여서
자기 마음이 있어
가만히 둘게
가만히 둘게
나는 숲속에 혼자 누워 있고 싶다.
노트
Note
정주리
Jeong Juri
2020
시, 31행에 372자. 햇볕의 학습 시간 속에서 혼잣말하는 사람.
Poem, 31 line and 372 type. Soliloguizing person in the sunlight's lesson.
2016
시작부터 적이라니, 여자애가 껌을 딱딱 씹으며 말했다.
나는 돈이 없고
새벽의 김밥천국과 길에서
더더욱 여자애가 된다, 여자애가 뜨거운 껌을 퉤 뱉으며 말했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그 껌을 밟고
지나간다.
여자애가 히죽 웃는다.
사랑에 빠진 줄 알았는데
잠깐 잠에서 깬 거였다.
사랑에 빠진 줄 알았는데, 잠에서 깰 때마다
어김없이 뺨을 얻어맞고 있다.
창문 밖에서
누군가 소리치고 있다.
혼자서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씨발, 사랑한다니까?
내가 사랑해준다니까? 사랑해준다니까?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사랑에 빠진 줄 알았는데
어느새 길을 걷고 있다.
껌을 딱딱 씹고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적이라니, 여자애가 김밥천국에 들어서며 말했다.
어쨌든 난 여자애야, 돈이 조금 생겼고 언제나 내 주머니에 있는 건
아껴 쓸 정도의 돈도
아껴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돈도 아니다.
손에서 끈적거리는 땀
어렸을 때 나는 물건을 곧잘 훔치는 애, 돈이 있는데도 물건을 훔쳤어, 엄마 아빠, 내가 물건을 훔쳤어요, 걸린 적은 없어요, 그게 내 유일한 자랑거리랍니다, 때려주세요, 때려보세요, 난 언제까지 훔치면서 살까, 영원히, 어쩌면 딱 내일까지만,
나는 모든 주인들의 적이었겠지, 작고 귀여운 척하는, 도저히 들키지 않는 새끼도둑
사랑에 빠진 줄 알았는데
라면 국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죽은 파리였다.
아줌마!
라면에서 파리 나왔어요. 절반이나 먹었는데 이제 봤다니까요? 잘못했으면 파리까지 먹을 뻔했잖아요! 불결해
불길해
사랑에 빠진 줄 알았는데
모르고 목구멍으로 넘겼어도
구역질 정도는 참을만한 파리였다.
의기양양하게
김밥천국을 나오며 여자애가 말했다.
이제 어디 갈까?
잠깐 잠에서 깼을 때
사랑이라고 믿으면, 옥상에서 떨어지면서도
허공에 키스할 수 있어.
즐거운 건 항상 좋지, 사랑이라고 믿으면, 잠깐 부끄러운 건 참고
낡고 촌스러운 속옷 따위 훌렁 벗을 수 있지.
그런데 자꾸만 나는
뺨이 얼얼하다.
그만 때려, 뺨 좀 그만 때려 이 개새끼야!!!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길을 걷고 있다.
개새끼, 개새끼, 중얼거리면서 걷고 있다.
어엿한 적이라도 되고 싶다.
어엿한 적이라도 되고 싶은데……
그 새끼의 뺨을 후려칠 손이 내게 있나?
이마의 검질긴 땀이 반짝거린다.
이마의 반짝거림,
반짝거림을 상상하니까 두 손뼉을 마주치는 것 같다.
손이 내게 있나?
마침내 적이라고 생각하다니, 여자애가 새 껌을 꺼내 씹으며 말했다.
누군가는 나를 그냥 봐줬겠지, 죽은 파리 같으니까,
이미 삼켜진 것도 같으니까
딱히 보이지도 않으니까, 여자애가 껌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꿀꺽 삼켰다고 생각했는데,
여자애는 숨이 막혀 검붉어진 얼굴로
캑캑거리며
이렇게 다시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줄 알았는데 겨우
껌이라니……
2016
In the year 2016
정주리
Jeong Juri
2020
시, 66행에 1,027자. 적과 사랑과 지리멸렬함.
Poem, 66 line and 1,027 type. Enemy, Love and Incoherence.
quauaq@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