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에, 우리 원경이가 왔다마다



   가을에 접어들며 쉽게 해소되지 않는 피로가 몰려왔다. 무너져버린 계획, 예상 밖의 사건, 혹은 예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치를 비웃듯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누구든 그만큼은 지쳐 있었을 것이다. 이 시대는 누구에게든 버거운 시간일 것이므로 어디다 대고 투정을 부리기란 불가능했다. 어떤 하루는 살고 어떤 하루는 견뎠다. 달력을 넘기며 이만큼 왔구나, 하며 안도한 뒤에 또 헤아릴 수 없는 저만큼을 살거나 견뎌보려 했다.
   9월 초입의 화요일이었다. 엄마는 주치의로부터 언제든 연락을 받을 수 있도록 휴대전화를 켜둘 것을 당부받은 터라 아침 일찍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향했다. 집을 나서는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잠시 정신을 팔다가 다시 졸음이 몰려와 누우려 할 때 메시지를 받았다. ‘돌아가셨어.’ 다섯 글자에는 덧붙여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무게가 실려 있었다. 곧 그 무게가 내 안 어딘가에도 내동댕이쳐지는 듯했다. 잠시 눈을 감고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나의 외할아버지 이칠섭 미카엘은 목소리가 크고 장난기가 많은 분이셨다. 전화를 걸면 장난스럽게 “하-이, 모시모시!” 하며 받으셨고, 고마울 땐 “어허, 땡큐 베리 모치!”라고 외치셨으며, 누군가를 배웅할 때면 “굿빠-이, 굿빠-이!” 하고 외치셨다. 그리고 자주 내 이름을 헷갈리셨는데, 그 시작은 아마 십년 전, 그러니까 그가 팔십세쯤 되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자주 얼굴을 비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강한 자아를 사수하며 사춘기를 보내던 내게 그런 일은 섭섭하고 억울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이름은 잘 모르시면서 나보다 열댓살 어린 남자 사촌들의 이름은 잘도 기억하고 부르시는 게 싫었다. 외갓집에 들어서고 나면 언제나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냐, 니가 누구냐?”
   “원경이요, 소연이 셋째 딸이에요.”


   그러고 나서는 몸을 약간 움츠렸다. 미카엘의 목소리가 무척 크기 때문이었다. 내가 소개를 마치면 그는,


   “허허허, 니가 원경이냐! 시상에! 원경이가 왔다마다!”


   이런 식으로 나를 환영해주셨다. 살면서 그런 우렁차고 격한 환영 인사를 받아볼 일이 몇 번이나 될까? 그것은 헐리우드급 반응이었다. 미카엘은 종종 나를 은경이라고도 부르시고 언경이라고도 부르셨지만 그게 모두 나를 부르는 말이라는 건 얼마든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천둥소리 같던 목소리를 이제 들을 수 없다니.
   1년이 넘게 이어진 미카엘의 병원 생활은 가족들에게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과도 같았던 것 같다. 그의 일곱 자녀들이 제법 침착한 자세로 한자리에 모였다. 병원에 들러 사망진단서를 챙기는 일이 내 몫이었으므로 교외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은 아침부터 진료를 기다리는 노인 환자들로 정신이 없었다. 차례를 기다려 서류 봉투를 받아들고 잠시 차에 앉아 숨을 돌리며 봉투를 열어 보았다. 미카엘의 이름 석 자와 생소한 의료 용어가 나열되어 있었고, 구체적인 시간도 적혀 있었다. 어떤 이에게 죽음은 커다랗고 무겁지만 어떤 이에게는 죽음을 다루는 것이 아침 식사처럼 반복되는 일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의 일상과는 전혀 무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차분하게 알려주는 종이 몇 장. 당분간 그 기분을 설명할 단어는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장례식장 뒤편에는 상주와 그의 가족들이 머무르는 방이 있다. 미카엘과 그의 자녀와 자녀들의 배우자 및 자녀들을 모두 합치면 서른 명이 다 되었으므로 우리 가족은 넉넉히 방 세 개를 이용했는데, 그 방들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과하다 싶을 만큼 서로에게 밥을 먹으라고 권했다. 방금 밥을 먹고 돌아선 것 같은데 마주치기만 하면 밥은 먹었어? 얼른 밥 먹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래서 우리는 평소보다 밥을 자주, 많이 먹었다. 그곳은 훌쩍거리는 소리보다는 서로의 끼니를 걱정하고 챙기는 말이 더 자주 들리는 곳이었다. 내 얼굴만 보면 밥을 먹으라고 권하는, 부모의 죽음 앞에 다소 침착해진, 이제는 흰머리가 무성한 미카엘의 자녀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어른이 된 사람이라도 사는 동안에 거듭해서 어른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튿날 입관식에 앞서 너무 어린 손주들은 방에 남기로 하고, 아주 자란 손주들과 어느 정도 자란 손주들까지 스무 명 정도의 가족이 모여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 사실 조금 두려웠기 때문에 미리 ‘입관식 절차’를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입관식을 지켜본 사람들의 경험담 비슷한 것을 찾아 읽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모습,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사라진 채 육신만 남은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너무나 편안히 잠든 얼굴을 보며 안도감을 느꼈다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모습을 보고 인사를 건네지 못한 탓에 평생의 후회로 남았다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 시간을 함께하기로 했다.
   가족들이 많은 탓에 조금 멀리에서 지켜보았는데도 그의 맑은 얼굴이 분명히 잘 보였다. 아이고, 세상에, 같은 탄식과 함께 아이처럼 우는 그의 일곱 자녀들 뒤에 선 나도 눈물을 훔쳤다. 깊은 잠에 빠져든 것 같은 미카엘의 얼굴을 만져볼 수는 없었지만, 무척이나 편안한 표정 때문인지 그 감촉은 전혀 차가울 것 같지 않았다.
   미카엘의 막내는 옛날에 전화를 받지 않고 화를 내기만 했던 것이 미안하다고 말하며 울었다. 미카엘의 둘째는 지난번에 밥을 안 차려주었던 일이 너무 미안하다고 제발 용서해달라며 울부짖었다. 흰머리가 무성한 아들들은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미카엘의 넷째는 딸의 품에 안겨 얼굴이 검붉은 빛이 되도록 울었다. 미카엘의 맏딸은 그의 손을 잡으며 평생 일을 하셨으니 그곳에서는 절대 일을 하지 말라며 울었다. 미카엘의 셋째는 아버지는 이미 아픈 몸을 벗어던지고 훨훨 날아가셨다고 말했다. 그의 일곱 자녀들은 각자의 마음으로 울거나, 울부짖거나,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울음을 토하거나, 간절하게 용서를 빌었지만 미카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삼십여 년 전 아내가 준비해 둔 수의를 입고서 우리와 작별했다. 미카엘이 자신의 몸에 딱 맞게 누운 관의 뚜껑이 닫혔다. 각자의 울음, 각자의 말로 미카엘을 배웅하던 그의 자녀들은 그 순간 어떤 미움도, 잘못도, 용서를 구하는 말도 다 잊어버렸다. 사랑한다는 말과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모든 기억이 너무 생생하기도 하고 흐릿하기도 하고, 또 그것들이 한데 모여 뒤죽박죽이기도 하다. 그저 이튿날의 입관식이 미카엘과 가족들이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마지막 순간이었기 때문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런 기억들을 되살리고 있노라면 시간이 많은 것들의 윤곽을 무섭도록 선명하게 드러내거나 지워버린다는 사실이 새삼 두려워진다. 미카엘의 부재와 막막한 슬픔은 아직 실제라고 믿기 힘들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안녕을 바라며 지켜보았던 그의 얼굴과 점점 희미해질 그의 목소리를 애쓰며 기억하는 일,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여 서로의 등을 열심히 어루만지고 위로하던 손의 감촉 같은 것들을 잊지 않는 일뿐이다.
   여섯살 된 나의 조카들은 얼굴도 잘 모르는 증조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천장이 막혀있는데 어떻게 하늘나라로 가실 수 있는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앞으로 기억해야 할 사랑과 그리움의 감촉을 매만지며 슬피 울던 미카엘의 자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의 일화를 떠올리며 그래, 그때, 맞아, 하면서 울다가 웃다가 하였다. 삼일 내내 슬프고 귀엽고 가끔 웃음이 나면서도 아픈 것들을 바라보며 그 속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고 나니 주변의 걱정과는 무관하게 되려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일상에 복귀했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괜찮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도 괜찮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시작된 애도의 과정이 괜찮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괜찮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별은 수차례 겪었어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이별 앞에서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배운 것은 이별의 감각이 아니라, 아무래도 평생 이별을 능숙하게 해내기는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다. 우리는 아직도 미카엘과 이별하고 있다. 그래서 자꾸 빈틈이 생기는 마음을 메우기 위해 밥은 먹었냐는 물음과 함께 밥상 앞에 모인다. 그래서 다시 힘낼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 서로의 끼니를 걱정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간혹 꿈에서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내 기억 속의 미카엘은 하루 종일 달리기를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과수원에서 키워낸 과일을 담아 자녀들에게 무거운 택배 상자를 부치는 성실한 농부이며, 문을 열고 들어간 거실의 일인용 소파에 앉아 복숭아, 배, 감 같은 것들을 깎아 ‘아따, 달다.’ 하시며 자신이 키운 열매를 권하는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분이다. 매번 나에게 누구냐고 묻지만, 내가 누구든 바다 건너온 피붙이를 대하듯 환영 인사를 건네는 사람. 차분히 그 모습을 떠올리면 입안이 차갑고 단 배즙으로 찬 듯 시원하고 달다.
   두려운 시간이었지만 다정한 사람들을 곁에 둔 채 9월을 시작했다. 날이 부쩍 쌀쌀해진 이후에도 여전히 짙은 피로감에 짓눌린 채 아침에 눈 뜨고 하루를 보내며 많은 생각을 떠올리곤 한다. 갑작스럽지 않은 이별이란 게 있기나 할까. 미워하는 마음 없이 사랑할 수는 없는 걸까. 돌이킬 수 없는 이별 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만이 남는 걸까. 이러다 나도 어느 날 후회와 미안, 용서를 구하는 말만 남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안녕을 고하는 순간에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요, 사랑했어요.’ 같은 말이 아니라 ‘사랑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오랫동안 다지고 쌓아 온 어떤 미움도, 잘못도, 용서도, 그 사랑 앞에서는 무용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다. 미카엘이 병원에 입원하기 얼마 전, 내게 하셨던 질문이 떠올라서다. “원경이는, 학교 졸업하고 노냐?” 평소엔 내 이름도 잘 모르시더니 내가 학교 졸업하고 노는 건 어떻게 아셨던 건지! 하지만 이제 학교도 노는 것도 졸업했으니 미카엘이 과수원에 출근하듯 나도 내 몫의 땅을 성실하게 일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런 생각 속에서 한참의 방황을 끝내고 나면 어느새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린 그가 허허허, 웃으며 소파에 앉아 내 이름을 잘못 부르시는 듯하다. 은경아! 그리고 그 소리는 아주 크고 우렁차서 머릿속이 다 환해질 정도이다. 시상에, 우리 원경이가 왔다마다! 언제나 열렬한 환영 인사를 건네던 미카엘을 기억하며, 이제는 나도 유쾌하고 씩씩한 인사로 그를 배웅하려고 한다.
   모시모시? 땡큐 베리 머치, 굿바이, 굿바이!


시상에, 우리 원경이가 왔다마다
Goodbye, Michael

김원경
Kim Won Gyeong


2020
에세이, 22개의 문단. 외할아버지 이칠섭 미카엘에 대한 회상.

Essay, 22 paragraph. Memory of grandpa Michael.


etccon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