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판화



   그들은 새로운 판화를 찍는다고 한다 날카로운 눈과 열도 높은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전시를 기획 중이라고 한다 그들은 민중미술이 커튼 뒤로 넘어가선 안 된다고 말한다 파서 새기는 행위는 목판 위에서만 이루어질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생각이라는 것도 잘만 하면 회를 뜰 수 있어요 그들은 산처럼 수북이 쌓인 가을 전어 앞에서 사후판화라는 용어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칼질에 대해서 혈육에 대해서 그런데 큐레이터 선생님 왜 눈을 질끈 감고 계세요? 이 세상에 의미가 흔들리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져요 그런 생각들은 전부 다
   트럭 째 싣고 가서 구덩이에 전부 쏟아 버려라
   보다 나은 전시와 관람을 위해서 훌륭한 서문을 위해서

   사실 이 모든 것들이 고급스럽게 가꿔진 히스테리가 아닌가요, 그런 말들은 미처 전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두운 방에 혼자 앉아 빈 어항을 닦았다 기념 사업회 사람들은 내가 좀처럼 웃지 않는다고 지적했었지 하지만 언젠가부터 귀에 거슬리는 소리들은 보글거리는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나는 이제 섬처럼 살아가는 습관을 내 안에 들여야만 했다

   목과 두 손이 달랑달랑 매달린 불구의 섬
   갤러리와 병동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스스로를 우스꽝스러운 섬으로 변환시켜야만 가능한 것들에 관해 성찰해야만 한다
   해석과 변환에 능한 사람은 이런 헛소리를 길게 쓸 수도 있다

   나는 얼어붙은 호수를 보듯 아버지의 판을 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요

   눈이 쏟아지던 날, 빛나는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몰려와 아버지의 집을 더럽히며 좋은 일과 용감한 일과 집요한 추적에 관해 설토하던 오후가 기억납니다 그들은 먼지가 일렁이는 다락방에서 아버지가 꽁꽁 숨겨둔 마지막 판을 찾아내고야 말았지요

   죽은 사람의 허공에 쥐가 달려 다니던 날이었습니다

   그들은 광목으로 판을 조심히 감싸 안고 떠나갔습니다
   그 이후로 내 시간은 항상 나뭇잎처럼 흔들렸습니다


새로운 판화
Unusual Print

이서영
Lee Seo Young


2020
시, 14행에 692자. 기억을 깎아 만든 목판, 얼어붙은 호수색깔 잉크.
Poem, 14 line and 692 type. A woodblock being carved out of memory, a frozen lake-colored ink.


   키치한 실내



   한쪽 면에는 전면유리, 나머지 면들에는 벽돌이 가득 메워져 있고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절반 이상이 감긴 눈
   벽걸이 세계지도에는 원두의 원산지가 각 대륙 별로 적혀져 있네

   나는 이토록 고전적인 인테리어 속에 가만히 앉아서
   결정적인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파르페 꼭대기에 꽂힌 우산처럼 키치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키치, 라는 말을 들으면 고양이의 입가가 가장 먼저 떠오르고
   흑발의 일본인 여성이 사뿐히 밟고 있는 꽃잎 같은 것도 언뜻 지나가지만
   오늘만큼은 누군가의 몸으로부터 빼낸 갈비뼈 하나를 꼭 쥔 채
   자기만의 저택으로 걸어가는 사람을 키치라고 불러볼까 합니다
   점차 멀어지는 등의 모습은 꼭 그을린 자국처럼 보이겠지요
   양초가 쓰러지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
   온몸이 검게 그을려 예언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

   어디에나 있을 것 같았던 키치는 정작 제 모습을 함부로 드러내는 일이 없지
   흐린 날에 조금씩 말라가는 고양이처럼 귀퉁이에서 점차 희미해져가는 키치
   오래된 맨션 늙은 꽃나무에 목을 걸어버린 키치
   언젠가 흔들거리는 다리를 부둥켜안고
   네가 저무는 타이밍은 아주 나중에서야 올 거라고
   구차한 자세로 설득하기도 했습니다만

   난 이 장면을 꼭 더럽고 나쁜 꿈속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철지난 팝송의 전형적인 코드가 귓속에 끈적하게 들러붙고
   웨이터들은 딱히 대기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질 낮은 농담만 나누고
   더러운 칼라가 너덜거리는 셔츠를 입고 온 나는
   옛날 사람답게 가만히 앉아 있어야지

   깨끗하게 씻은 화병마다 라넌큘러스, 델피늄 따위의 꽃들을 가득 채우고
   실내를 실내답게 가꾸려하는 키치와 키치한 실내에 가만히 앉아 있는 나는
   도대체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걸까요 닮은 걸까요 다른 걸까요

   키치에 대한 증언들은 매일매일 수백가지 정도 쏟아져 나오고
   진짜 키치를 보고 싶다, 진짜 키치라는 말을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것은
   모두를 냉담하게 할 수 있지만 그런 걸 딱히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도 누군가의 갈비뼈를 주워와 빗장처럼 걸어 잠근 채
   이 모든 시간들을 뭉툭하게 자르고 있어
   자기만의 성곽, 그런 것을 완전한 1인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키치는 그 속에서 진정한 혼자가 되려고 하는 걸까요
   리얼이 되려고 하는 걸까요 전력을 다한 시늉이야말로
   키치를 구성하는 필요충분조건인데

   키치는 왜 내 안에서 자꾸 서늘해지는가 목 매달 나무를 찾아 헤매 다니며
   오랫동안 서성이다 살며시 빗장뼈를 어루만지는가
   그는 왜 내 밖에서 파르페 위에 꽂혀 있을 법한 생김새의 양산을 쥐고
   오래된 맨션이 있는 언덕을 오르는가
   으깨지는 햇살 속에서 점차 희미해지는가

   나는 여전히 둥근 테이블에 앉아 차가운 음료와 대면하며
   인간을 기다립니다 키치를 기다립니다
   실내를 실내답게 만드는 풍경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최선을 다해 실내에 실내를 보태갑니다


키치한 실내
Kitsch Cafeteria

이서영
Lee Seo Young


2020
시, 45행에 1,022자. 누군가를 기다리며 익숙한 풍경을 완성하는 사람.
Poem, 45 line and 1,022 type. The one who completes a familiar landscape during waiting for some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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