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나는 벽
소리 나는 벽
늦은 장마가 오고 있는 8월의 한낮이었다. 한 건물의 외벽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는 무거운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장 난 에어컨 실외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가방에 닿았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아이가 개의치 않아 했던 것은 물줄기뿐이 아니었다. 오래된 건물 외벽에는 누군가의 토사물, 담배꽁초, 오줌, 침이 가득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분비물들 때문에 이 공간은 온갖 벌레들의 성지였다. 살집이 있는 아이의 몸은 벌써 땀범벅이었고 곁으로 벌레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고장 난 실외기는 일정한 소음을 내며 아이의 머리 위를 여전히 배회했고 그 사이에도 벌레들은 꾸준히 알을 까고 나왔다. 등 뒤로는 바로 또 다른 건물이 있었기에 매우 비좁았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려 해도 높은 건물이 아이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평온한 표정으로 벽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 모습은 익숙해 보인다. 곧이어 아이는 가방에서 연필을 꺼내 벽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혹은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 날 내 잘못은 없다 찢어진 고압 전선에 의한 사망 아빠는 전봇대의 꼭대기를 좋아했다 여름의 오후는 늘어진 전선을 걸으며 땅으로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장마가 오는 날은 더했다 태풍은 아빠를 설레게 했고 밤이 오면 선글라스를 꼈다 겨울이 되면 아빠는 냉장고에 들어갔다 가끔 반찬을 꺼낼 때 아빠를 만나는데 아빠는 여름날 고압전선을 품고 있다 축 처진 젖꼭지를 보며 고압전선을 절단하고 싶다 무릎을 감싼 열 손가락은 씹어 먹고 싶다 그 날 이후 나는 냉장고 문을 철저히 닫았다 잘못이 없었다 냉장고에 들어간 건 아빠의 몫이었다 20…년 여름은 아빠의 세상 아빠가 들어오지 않아 냉장고는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계란을 꺼내 먹었다 아빠는 계란 비린내가 나는 집을 싫어했다 그래서 불을 붙이고 다녔구나 아빠는 선글라스를 끼고 달을 봤다 젖꼭지를 만지며 소원을 비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우리 동네에는 …가 많아서 가끔 전기가 흐른다 그 소리는 아빠가 오줌 싸는 거랑 비슷해서 계란을 토한다
열 밤 후에 온다는 아빠의 말을 믿은 아이는 내일도 이곳에 올 것이다. 내일은 시끄러운 실외기에 물감을 칠할 생각이다.
이곳은 무수하고 이곳에 존재하는 아이도 무한하다. 아무도 보지 못할 아이의 흔적들은 장맛비에 더욱 지워져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아이는 또 다시 이 벽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든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세상으로 표출하려 한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공간들, 찬 공기가 머무르는 작업실이거나, 빈 물통이 뒹구는 건조한 단칸방에서, 우리는 우리를 끊임없이 보여주려 한다.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비좁은 건물 벽 사이에서 우리의 소리는 여전히 나고 있다.
윤상하 X 김현진
2020
360cm X 240cm, Mixed Media
8 piece, Graffiti, Poe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