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
 
 
 
   운명의 목소리가 음이탈하여 잘못 부를지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
   의지는 무덤 같은 게 아니다
   무덤을 뚫고 나오는 손이다

   랑은 연극이 다 끝난 뒤 공연장 뒤편의 공터 바람
   시원함을 맞으며 샘솟는 영감을 다듬었다

   섣불리 답을 냈던 질문에 답을 다시 내보인다

   내 삶에 누가 비평을 썼는가?
   나폴레옹이 대지의 숨소리를 느끼듯
   군화가 돌진의 기개를 전달하듯
   누가 내 삶에 비평을 썼는가?
   전장은 황폐함의 자손인 양
   먼지에 휩싸이고
   누가 내 삶에 비평을 썼는가?
   사실 착각인 건 아닌지
   홀로 투구를 거꾸로(일부러) 쓰고
   어둠에 갇혀
   웅장했던 거라면
   멋지게
   허공의 칼질을
   무아지경으로
   하다
   베어
   자해로
   흐른 피를
   아픔이라고
   싸움이라고
   착각한
   내가
   제풀에 지쳐
   시체가 된 걸로 치고
   쓸쓸히
   걷고
   걸어
   땅을 파
   무덤을 만들었지
   입구로 들어갔지

   나는 거기 있던 것이다
   눈을 감고 있던 것이다
   살아 있음에도
   꿈꾸지 않은 것이다

   누가 내 삶에 비평을 썼겠는가?

   내가

   사실
   쓰레기통 안의 번역본
   아무도 못 읽겠지만
   거기
   서서
   찢기까지
   한 사실을
   아무도 모르지…

   찾아가려고 무덤을 갈랐다

   오래 누워 있어
   약간은 절뚝거리며 갈 것이다

   손으로 적은 걸
   손으로 찾으려고

   오늘은 극단 테스트를 보는 날이었으므로 랑은 긴장감을 비유로 추월하고자 했다
   마인드로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가끔 나는 것만 빼면 평안한 날들이었다
   요즘
   괴상한 소리가 유독
   많이 들렸지

   거기까지 랑이 생각할 무렵 낡은 뒷문으로 극단 매니저가 나왔다
   오긴 왔구나
   매니저의 눈빛은 상대를 분명한
   어린 애
   대충 자신의 꿈을 좇으려 하는 열정 캐릭터
   적당히 보내고
   저녁으로 마라탕이나 먹을 생각이었다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아
   매일 그렇게 문을 두드리면 원래 신고감이란다

   모멸감도 살짝 섞어주면서

   단지 네가 어리기 때문에…

   그러나 랑의 눈빛은 매니저의
   완고한 폭포를
   버티는
   선인

   연기자로서의 기개가 먼저였다

   매니저는 조금 당황하여
   흠. 시작하렴
   말했고
   랑이 준비한 건
   끝없이 밀려드는 요괴들과
   싸우는 히어로
   영웅
   검을 끝없이 휘두르는
   피가
   아낌없이 튀는
   이 이미지가 왜 떠올랐는지는 랑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이미지는 어느 날
   소리도 없이 호령하였을 뿐

   이것을 기억하라

   마치 오래된 일처럼…
   잊으면 안 되는 일처럼…

   매니저와 랑뿐인
   공연장 뒤편 공터

   쌀쌀한 바람이 둘을 스쳤고

   랑은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수많은 요괴를
   자르고 죽이고 자르고 죽이고
   자르고 죽이고
   자르고

   죽이다

   모든 연기가 끝났을 때
   편견은 보존량 법칙으로 자취를 감추고
   댓츠 나이스!
   속으로 매니저는
   쾌재를 부르며
   이것저것 상상을 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극단의 간판스타 코부 씨보다 더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겠는걸?
   매니저는 엔터테인먼트 사업 종사자 시선으로
   적당히 재능을 칭찬하면서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으며)
   괜찮네. 키워볼 만하겠어. 합격

   랑은 세상이 멈춤을
   느꼈다

   하두의 안개
   바람과 함께 비를 몰고 오기 시작하다

   가끔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빼도 특별한 날이었다

   랑은 부모님 동의서가 필요하다는 것이
   조금 걸렸지만

   오늘따라 더 영웅의 걸음으로
   집 앞에

   도착

   몰려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랑을
   마치
   연기하는 배우 보는 것처럼

   당신은 비에 젖은 새인 것 같았어요

   오,
   마침

   절뚝거리며 오는
   예언이여

클리셰

김병관

2023
시, 144행에 1166자. 내 삶에 쓰는 비평, 댓츠 나이스!

김병관

이야기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사람. 시를 쓸 땐 카프카의 문장을 주문처럼 떠올린다.
우리는 바벨탑 아래 굴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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