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유적지 : 영웅의 시작
 
 
 
   크루슈의 동공이 탁해지며 뒤돌아섰다. 그대로 자신의 꽃집이 아닌
   숲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랑은 오랫동안 생각했다
   불러 세우지 못했다
   당시 입은 꽃을 피우기에 적합한 기관이 아니어서
   왜 그랬지? 랑은 이해할 수 없는 그 날의 모습에
   죄책감을 붙여뒀었다
   스티커처럼
   기억이 허가한 죄처럼
   게임에 접속할 때마다
   크루슈에게
   연락했다. 대답은 오지 않았다. 연락처에만 남아 있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랑은 이 일이 자신의 일상에 궤도와 같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눈에 영 힘이 빠진 채로
   복도에서
   누군가와 어깨 부딪쳤을 때
   사과하지 않았다. 기분을 축내지 않았다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히네가 쉬는 시간
   랑을 더는 찾아오지 않을 무렵
   
   랑에겐 최종전이 남아 있었다
   
   중대한 문제는 그것뿐인 것처럼. 이 일이 다 지나간다면 뭐가 달라질 수 있나? 묻고 싶은 것처럼
   
   대기실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축구 경기를 직관한다 생각하면 이 이미지를 떠올리는 일이 수월할 것이다
   그들은 빈 콜로세움 경기장을 지금은 주목하지 않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경기를 기다리는 관객들은
   모두 천공의 유적지 관중석에 앉아
   
   -
   
   한쪽의 문에선
   랑이
   다른 한쪽의 문에선
   K가
   
   -
   
   중앙의 콜로세움 경기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둘은 마주쳤다
   
   -
   
   해골 가면의 권총
   K
   
   토끼탈
   당근 모형의 칼
   랑
   
   -
   
   K는 기다렸었다. 당근을 든 토끼탈과 마주하는 순간을
   꿈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이 장면을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랑은 기다렸었다.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 다시 자신을 붙잡기를
   열감이 자신을 덮어 그 무엇도 연관 없어지는 이 장면을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서로에게 겨누는 타점은 분명 달랐다
   운명이 겨우 한 움큼 섞인 것이다
   그들이 아주 오래전
   싸웠던 전장
   서로 죽이지 못했던 그 장소에서
   마주 봐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천공의 유적지 : 영웅의 시작

김병관

2023
시, 75행에 671자. 중앙의 콜로세움 경기장을 향해 걸어오는 그.

김병관

이야기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사람. 시를 쓸 땐 카프카의 문장을 주문처럼 떠올린다.
우리는 바벨탑 아래 굴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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