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버린 세계를 구한다는 게임의 내용은 흔하다
한껏 아름다운 거리에서
골목으로
골목에 나 있는
지하 계단으로
지하 계단의 길을 따라
월세 얼마 얼마에 보증금 얼마 종이가 마구 엉겨 붙어 있는 원룸 복도를 지나 도착
묘진은 열쇠로 문을 열었다. 약에 절어 바닥에 널브러진 학생들이 보였다
익숙하다는 듯 묘진은
거실의 컴퓨터를 켰다. 본체가 켜지는 소리.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습하죠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발이 조금 찐득거린다고 시스템이 알렸다
컴퓨터가 느리게 켜지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즈사의 새 퀘스트는 묘진을 통해 밀딜 유통업자와 접촉하기였는데
묘진은 이들에게 비스듬한 느낌
이것을 뭐라 말해야 할까? 평행하지 않은,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법한 따스함을 느껴
열쇠를 꺼내
아지트 문을 열었던 것이다. 유통업자와 접촉하기 위해선 컴퓨터가 필요했다
컴퓨터가 바탕 화면을 환하게 보여줬다. 묘진은 여러 폴더를 순서에 따라 들어갔다. 투박한 나뭇잎 문양 아이콘이 나올 때까지
‘크로노 어드벤처’
묘진은 더블 클릭했다. 크로노 어드벤처가 실행되었다. 요란한 8비트 음악과 함께
랑은 옛날 언제였나
비슷한 게임을 해봤던 거 같은데, 생각했다
-
크로노 어드벤처에 접속하시겠습니까?
묘진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확인 버튼을 눌렀다. 용사가 길을 걷다 몬스터를 만나면 싸우고, 또 길을 걷다 몬스터를 만나면 싸우고
망해버린 세계를 구한다는 내용의 로딩 화면이 끝났다
유통업자와의 만남은 게임 속에서 이뤄진다고
묘진은 말했다
과일 가게 주인이… 퀘스트를 주거든요. 유통업자와 약을 구하는 이들은 이 과일 가게 주인 퀘스트로 이어져 있다고. 묘진은 책상 서랍을 열어 쪽지 하나를 꺼낸다. 쪽지에 적혀 있다
우리가 만나는 방법 :
과일 가게 주인의 퀘스트를 수락한다. 이 퀘스트는 벌레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과일 가게 주인을 돕는 것이다. 이 퀘스트는 벌레 20마리를 죽여야 하는 타임 어택 무한 반복 사냥 퀘스트로
적당히 실패해야 한다. 돌아가서 과일 가게 주인에게 실망감을 줘야 한다. 반복한다. 실패한다. 과일 가게 주인이 우울감에 빠져 좌절할 때까지. 더는 그가 키우는 나무들을 관리하지 않을 때까지. 벌레들이 과일을 다 파먹고 나무까지 파먹을 무렵
한 나무는 구멍이 뻥 뚫려있을 것이다. 다람쥐 굴처럼 파인 그 나무의 어둠에 얼굴을 넣어라
묘진의 플레이를 보고 있었다. 벌레들이 죽어 그래픽이 사라지고 있었다. 망해버린 세계를 구한다는 뻔한 내용의 RPG를 그들은 보고 있었다
일부러 성공하지 않는 퀘스트를 보고 있었다. 뻔한 내용의 RPG는 묘진의 캐릭터가 나무의 어둠을 향해 얼굴을 집어넣었을 때
컴퓨터 화면의 어둠과 함께
달라질 수 있을까?
어두운 화면이 몇 초간 이어지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문구가 나왔다
묘진은 혼잣말로 조용히 비밀번호를 읊조렸다
…크루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