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슈
 
 
 
   크루슈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검은 화면이 사라진다. 새로 생성된 채팅창이 떠 있는 바탕 화면
   요. 무슨 일이야? 약은 최근에 받아 갔잖아?
   대화명 ‘뻐꾸기 34_크루슈’는 물었다. 뻐꾸기는 밀딜 유통업자들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꽃을 들고 있는 한 여자
   프로필 사진이 화사했다
   
   묘진은 머뭇거렸다. 어떻게 말할까? 이때 이즈사가 키보드 위에 재빨리 손을 얹는다
   새로 약을 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어서요 ㅎ_ㅎ;
   
   묘진이 뜨악한 표정으로 이즈사를 쳐다봤다
   그 말투 아니에요…
   
   밀딜 유통 업계가 지나치게 평등하다는 사실이 뻐꾸기 34_크루슈와 묘진을 반말하게 했다. 이전 채팅 기록을 확인할 방법이 없던 이즈사에겐 꽤 억울한 상황. 대화는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으악
   이즈사는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묘진을 쳐다봤지만
   게임 속에선 단지 무미건조하게 요정 캐릭터가 NPC를 쳐다보는 것으로 표현됐을 것이다
   
   누구?
   당신은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메시지니까
   
   다들 채팅창을 보며 가만히 있었다. 뻐꾸기 34_크루슈가 말하기 전까지
   
   말이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없는데 말이야. 당신 설마 < 외부인 >?
   
   외부인…
   랑은 지난날의 크루슈를 떠올리며 채팅 하나하나 가슴 아프게 보고 있었다. ‘34’라고 표현된 것이 자신의 잘못과 연관된 일임을 랑은 잘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올 만한 인물은 한 명밖에 없는 거로 아는데
   당신
   설마 ‘고등어반크림수프반’이야?
   
   고등어반크림수프반
   이즈사의 게임 캐릭터 닉네임으로 NPC들 사이에서 특히 유명했다. 별 이상한 부탁까지 다 들어주는 요정이 있다고. 요정은 NPC들과 대화를 하며 이런 얘기를 하고는 한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여기 있어
   
   뻐꾸기 34_크루슈는 요정의 소문에 대해 말하며, 채팅을 입력했다
   
   정말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
   
   경기가 없는 빈 축구장
   뻐꾸기 34_크루슈와 직접 보기로 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머리에 두건을 두른 뻐꾸기 34_크루슈는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랑은 머뭇거렸다. 크루슈. 지난날 숲속으로 사라져버린 그녀. 누가 봐도 그녀가 아님을 랑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오프라인 상태의 친구창을 쳐다봤기 때문이다
   
   뻐꾸기 34_크루슈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 외부인 >들과는 그때 이후로 처음이네. 담배를 한 모금 피우며 [천공의 유적지 : 영웅의 시작] 3 Round를 떠올리고 있었다
   고등어반크림수프반을 포함하여
   K
   CARROT RABBIT(랑의 게임 닉네임)
   결승에서 봤던 얼굴들도 있고. 뭐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피차 그러려고 만난 거니까
   
   랑은 뒤 없이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요
   
   뻐꾸기 34_크루슈는 피식 웃었다
   질문이 재밌네?
   음, 크루슈야. 크루슈. 당신들을 봤을 땐 꽃집을 운영했었고, 지금은 보다시피 마약 유통업자. 그 이전엔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지. 아마 이쪽에 더 흥미가 있으려나? 우리는 같은 티셔츠를 입고 공장에서 일했지. 500명이 같은 얼굴로 같은 티셔츠를 입고 다른 존재로
   그렇게 생각하면 좋지
   대답이 됐으려나?
   
   뻐꾸기 34_크루슈는
   공장 단지에서 월계화에 밀딜을 코팅하던 공정 과정을 떠올린다
   
   랑은 뒤이어
   숲속으로 사라진 크루슈를 혹시 알고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 물음에 뻐꾸기 34_크루슈는
   
   글쎄? 우린 너무 많아서?
   그런 건 있지
   특정 단어를 들으면
   우린 파기되게 돼 있거든. 뭐 네가 숲속으로 사라지게 했다면 아마 ‘특정 단어’를 말한 게 아닌가 싶고?
   근데 잘 몰라. 죽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랑은 그날 크루슈에게 했던 말을
   
   당신은 진짜가 아니잖아요
   
   숲속으로 누군가를 떠나 보내버린 말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더는 질문이 없이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고 뻐꾸기 34_크루슈는 랑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죄책감 느끼는 건 아니지? 에이 장난치지 마. 유저들은 그렇게 죽여놓고? 고작 NPC에?
   
   둘은 다른 거야?

크루슈

김병관

2023
시, 464행에 1,441자. 당신은 진짜가 아니잖아요 ㅎ_ㅎ;

김병관

이야기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사람. 시를 쓸 땐 카프카의 문장을 주문처럼 떠올린다.
우리는 바벨탑 아래 굴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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