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이야기 2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때 딱 한 번 골목에서 한 거잖아
   과도하게 흡입해야만
   환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거 아니야?
   그제야 악마가 나오는 거 아냐?
   해골가면이 말했다
   그런… 설정이잖아…
   
   해골가면은 요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도 대답해보라고
   
   요정은 환각 증세를 느낀다. 악마가 마을의 고목에 앉아 자신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음을 그런 나무는 없었는데도 어느새
   
   애써 웃는다. 요정은 악마의 시선을 느낀다
   트리거일지도…
   요정은 악마의 시선을 느낀다. 분명 토끼탈과 해골가면을 바라본 건데도
   
   내가 여기 있는 방식은 너희를 인도하는 거였을까?
   
   요정은 악마의 시선을 느낀다
   
   필요 있을 때까지만
   쓸모 있을 때까지만
   
   요정은 악마가 고목에서 내려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이야기의 고리로 살려두고는 했으니까. 적은 늘 그랬으니까
   …역할이라는 게 있는 거야
   
   요정은 악마가 이제는 자신에게 다가와 얘기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는 이 판을 만들고
   게임을 만들고
   누군가는 진실을
   누군가는 자신에게 다가와 주길
   누군가는 괴인이
   누군가는 돌이
   누군가는 플레이어가
   누군가는 구원자
   누군가는 사기꾼으로
   
   …
   
   나는 그런 게 아니었을까
   나는 너희들을 위한
   
   악마가 요정 옆에서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아니 뭐래 진짜!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잘 있다가 왜
   멀쩡하다가 왜…
   해골가면은 짜증이 난다는 듯, 다 죽어가는 것처럼 말하는 요정에게 애꿎은 화를 내고
   
   그러니까 내 역할은 여기까지인가
   
   이미 정상을 벗어난 사람처럼 요정이 혼잣말하고
   
   악마가 요정 바로 앞에서
   여기저기 쳐다본다
   물어본다
   
   당신은 내가 보이는가
   
   -
   
   키튼은 영상 속에서 혼잣말로 떠들어대는 요정을 본다
   
   떠나고 싶지 않은데
   나 정말 떠나고 싶지 않은데
   우울하다
   우울하다
   되뇌며 거리를 맴도는
   지금까지의 카리스마는 어디에도 없는
   당당함이 사라진
   붕괴돼버린
   
   -
   
   그럼 이제 어쩌라는 건가
   
   요정은 거리를 맴돌고 토끼탈과 해골가면은 마음이 아팠지만
   
   마녀의 부활만 막으면
   이들이 약을 먹지 못하게 약을 뺏는다면
   그럼
   모든 게 괜찮을까?
   다시 돌아올까?
   
   토끼탈과 해골가면은 NPC들의 밀딜을 뺏기 시작한다. 바닥에 떨어진 가루들을 쓸어 담는다. NPC들이 괴로워 보여도 약을 다 갈취하며
   그들에게 미움받았다
   왜
   왜 가져가
   돌려줘
   돌려주세요…
   제발
   제발
   우리도 살아가자 좀…
   
   우리라는 것이 무너질 때까지
   밀딜을 뺏으며, 그들의 생존 욕구를 가져가며 흡사 토끼탈과 해골가면은 악당이 되어가고 있었다
   키튼은 영상을 보며, 아무 힘없는 NPC들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빼앗기는 걸 보며, 왜 그토록 NPC들이 자신을 미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전부를 가져가서
   생존 욕구를 가져가서
   
   밀딜을 수거하며
   누군가는 악당이 되고
   
   힘없는 그들의 손아귀를 애써
   떼어내며
   토끼탈과 해골가면은
   이 행위에 그래도 답이 있길 바랐다
   
   그 소리가 울리기 전까진
   
   -
   
   징글벨
   징글벨
   징글 올 더 웨이
   공중에서
   거대한
   눈알 썰매를 타고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자들
   화면은
   그들을 비춘다
   산타클로스처럼
   열심히 보따리에서 가루를 꺼내 뿌리는 자들
   몇백 명의 크루슈들이 열심히 가루를 뿌렸다
   그들은 패딩에
   뻐꾸기 1_크루슈
   뻐꾸기 5_크루슈
   뻐꾸기 22_크루슈 등으로
   이름표가
   쓰여 있었기에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하늘에서 수많은 가루가 떨어진다
   뿌옇게
   
   키튼은 영상을 보며 언젠가 봤던 하두의 안개
   떠올렸다
   
   -이곳은 안개가 많이 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키튼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손을 잡자 
   
   잊었던 목소리가
   랑의 말들이
   
   -앞이 안 보인다면
   
   키튼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우리는 같이 있어
   
   영상에선
   
   징글벨
   징글벨
   징글 올 더 웨이
   
   뿌옇게
   뿌옇게
   
   하늘은 덮인다
   
   모두
   가루의 축복을 신성시해
   
   사라졌다
   
   모두
   악마를 바라보는가
   
   사라지고
   사라지고
   
   빛의 공간은 순식간에 넓어지고
   
   토끼탈과
   해골가면은
   그들의 전력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게임 속 세계에 적응이 안 된 몸
   단순히 스킬만 누르고
   반응만 하면 됐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럼에도 노력했다
   가루를 없앴다
   
   난사
   전 범위에서 해골가면의 총탄이 날아오르고
   
   초신속
   토끼탈이 가루마저 분쇄해버리는
   그 작은
   형체마저 없애버리는
   
   둘의 풍경
   
   크루슈들이 떼거지로 죽었다
   가루를 뿌리다
   
   징글벨
   징글벨
   
   그러나 크루슈들을 태운
   거대 눈알 썰매도 그에 못지않게 빠르고
   
   세상은 이미 하얀 계절
   
   구석에서
   요정은 가루를 뒤집어쓰고
   쭈그려 앉아있다
   세상이 흰 가루로 다 덮여서
   손으로
   끄적끄적 낙서한다
   
   낙서는
   어떤 상징도 아닌
   평범한 그림
   
   웃는 가족
   
   하늘에선 크루슈들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피가 흩날리고
   
   사람들 사라져가다
   
   더 넓어지는 빛의 공간
   사람들은 이제 다 사라졌다
   
   흰 백의 공간
   
   요정만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커져가는 빛의 공간 속에서
   
   마녀
   토끼탈
   해골가면
   요정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시작이자 끝일 것이다
   이곳에서
   
   그리고 마녀의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으히히
   
   크루슈들처럼 이름표가 붙어있는
   패딩을 입고
   고스트 스토어가 빛의 공간 너머에서 나타났다
   이제는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담소도 없이
   토끼탈, 해골가면은 달려들었다
   유령들이 아주 가볍게 손으로 툭 날려버린다
   바닥에 쳐박힌다
   
   낙서를 하고 있는 요정
   피를 토하고 있는 토끼탈과 해골가면
   
   정신을 못 차리는 그들을 향해
   유령들이
   다가선다
   달라붙어
   토끼탈, 해골가면, 요정의 캐릭터를
   가죽처럼
   벗겨낸다
   캐릭터의 외관을
   
   너무 쉽게
   토끼탈, 해골가면, 요정은
   자신의 얼굴로
   
   토끼탈은 랑
   해골가면은 미드나잇 키튼
   요정은 이즈사로서
   
   캐릭터가 아닌 그들의 모습으로
   
   저 너머에서 온 자들
   주위엔
   아무도 없음에도
   그들은 다 사라진 세계
   지키기 위해
   영웅이 되어
   악 앞에 선다
   
   아무도 모를 일들을 위해

영웅 이야기 2

김병관

2023
시, 291행에 2,066자. 누군가는 영웅이, 누군가는 악인이.

김병관

이야기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사람. 시를 쓸 땐 카프카의 문장을 주문처럼 떠올린다.
우리는 바벨탑 아래 굴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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