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천사라고 부르네
  
 
   
   내게는 때 묻지 않은 흰 옷가지가 없지만
   꿰뚫어 보이는 무구함도 선량함도 없지만
   너는 나를 천사라고 부르네
 
   사실 너는 나를 천사라 놀리는 거지?
   나의 못됨이 하나도 천사 같지 않아서
   내가 나를 부끄러워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혼자서만 속에 품고 있던
   네 자리 숫자를 들켜버린 이후로
   네게 자꾸 놀림만 받게 됐다
 
   생일에는 한 살 늙음을
   신년에는 다시 한 살 늙음을
   너는 나보다 영원히 젊은 동생일 거라며
   네 자리 날짜로 된 기념일을 잊지 않으면서
 
   우린 아직 슬픔을 나누어본 적은 없어서
   네 앞에서 우는 건 상상할 수가 없는데
   아마도 나의 늙음을 잊고
   너의 동생이 되어버린 기분이겠지
 
   조금은 부끄럽고 어색할 거야
   서로의 마음을 잠그고 있던 네 자리 숫자
   몰래 비워둔 너의 자리를 들킨 것처럼
 
   너는 나의 이름 뒤에 자꾸 천사를 붙이고
   덕분에 하루는
   생크림 범벅이 된 얼굴처럼
   깔깔대며 우리를 웃기기도 하지
 
   알려준 적 없는 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너의 장난기처럼

너는 나를 천사라고 부르네


조온윤


2025

시, 34행에 345자. 너는 나를 천사라 놀리는 거지?

원형_행성_흰색-02.png
원형_행성_흰색-02.png
원형_행성_흰색-02.png
원형_행성_흰색-02.png
원형_행성_흰색-02.png
온윤어에는 소심한 천사가 살고 있어서
   
   
   
   시작은 이렇다. 어느 카페에서 온윤, 소현과 공통점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윤의 노트북을 쓰던 소현이 비밀번호가 뭐냐고 물었다. ‘온윤1004’라는 대답에 내 장난기는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도 꽤나 놀렸던 것 같은데 난 더 놀리고 싶은 마음에 연락처 주소록 이름도 ‘온윤1004’로 바꾸었다.
   저장명이 익숙해져 이질감이 점점 없어질 즈음, 온윤과 함께하는 단톡방에 카톡 내용 캡처를 올렸는데 저장명이 ‘온윤1004’인 것을 모두에게 들켰다. 바꾼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저장명은 그대로다.
   그리고 온윤의 시를 읽는다.
 
   내게는 때 묻지 않은 흰 옷가지가 없지만 
   꿰뚫어 보이는 무구함도 선량함도 없지만 
   너는 나를 천사라고 부르네 

   사실 너는 나를 천사라 놀리는 거지?

   ―「너는 나를 천사라고 부르네」 중에서

   우리가 알게 된 지는 벌써 10년이 되어 간다. 처음에 어색해하고 낯가리던 모습도, 지금 내 앞에서만큼은 형의 모습으로 짓궂은 장난을 치는 모습도 모두 ‘온윤’ 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장면들이다. 이제는 그의 여러 단면들을 알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마음으로 말하는지 조금은 짐작이 가기도 한다. 내가 지칭하는 ‘온윤어’는 배려에 배려를 품고 있다.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오래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는 언어들이다. 가끔 답답할 때도 있지만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언어들이기에 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려 한다. 온윤은 말을 꺼내기까지 오랜 고민과 걱정 속에서 한 문장, 한 문장 정리해나갔을 것이다. 그 말들은 모두 상대와 함께하고 싶은, 함께 공통점을 나누고 싶은 애정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나는 ‘온윤어에는 소심한 천사가 살고 있어서 (그를 천사라 부른다)’고 답을 한다.
   공통점 멤버들이 여러 지역으로 멀리 떨어지게 된 후, 우리는 매달 화상으로 합평회를 진행했다. 어느 날은 유독 내 시에 대한 얘기를 여럿이서 나누는 게 힘든 날이 있었는데, 지쳐 보이는 내 표정이 걱정되었는지 다음 날 온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경, 합평 때 너무 힘들어 보이더라고. 걱정돼서 전화했어. 원고 봐줄 수 있으니 언제든 연락하라고.”
   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온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온윤도 바쁠 텐데 정성 어린 피드백이 왔다. 바쁘게 회사를 다니는 와중에, 거기다 개인적인 경사와 시집 출간을 앞둔 와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피드백을 해준 것이다. 비싼 과외를 받은 기분으로, 온윤의 세심한 진심을 마주하는 마음으로 퇴고를 했다. 온윤 덕에 새로운 퇴고 방법을 익히는 요즘이다.

   우린 아직 슬픔을 나누어본 적은 없어서 
   네 앞에서 우는 건 상상할 수가 없는데 
   아마도 나의 늙음을 잊고 
   너의 동생이 되어버린 기분이겠지 

   조금은 부끄럽고 어색할 거야 
   서로의 마음을 잠그고 있는 네 자리 숫자 
   비밀번호를 들킨 것처럼 

   (……) 

   알려준 적 없는 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너의 장난기처럼

   ―「너는 나를 천사라고 부르네」 중에서
 
   난 슬픈 이야기를 너무 깊게 나누길 망설인다. 내 슬픔이 상대를 지치게도, 걱정하게도 만드니까. 또 슬픔이 관계에서 무기가 되기도 하니까. 물론 내 지인들이 내 슬픔을 그리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내 슬픔이 지인들을 힘들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내겐 슬픔보다 적당한 진심과 장난기가 적성에 맞다. ​온윤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방법을 알지만, 온윤 또한 내 비밀번호를 누르는 방법을 알지만, 적당한 장난기로 서로의 아픈 자리까지는 들어가지 않는 대화가 좋다. 그게 내가 온윤의 천사를 오래 지켜보는 방식이다. 소심한 천사가 진심을 꺼내길 조용히 기다리기, 민망하지 않게 장난을 치기, 내 마음도 담백하게 전하기.
   가끔은 슬픔을 나눠도 좋겠다는 진심을 잠시 넣어둔 채.

   P.S.
   아, 그리고 온윤이 형인데 편의상 온윤이라고 부르고 있다.
   온윤이 형은 천사이니 이해해줄 것이다. 아마도……?

온윤어에는 소심한 천사가 살고 있어서


김도경


2025

산문, 39문단에 1407자. 가끔은 슬픔을 나눠도 좋겠다는 진심.


조온윤_프로필.png
조온윤

화성에서 시를 쓰며 지내고 있다. 시집 『햇볕 쬐기』 『자꾸만 꿈만 꾸자』가 있다. 문학동인 공통점에서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e-mail : onewnx@naver.com
김도경_프로필.png
김도경

2021년 심훈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동인 공통점에서 활동하고 있다.

Instagram : ​@do_gyoung2
e-mail : basun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