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끝
가영을 잘 모른다. 결국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겠지. 공통점에 뒤늦게 합류한 가영과 공통점이라는 이름 안에서, 혹은 그 이름에 의해 함께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기억나는 건 어느 추운 겨울날, 그날은 다소 왁자지껄한 술자리였다. 대화를 많이 나누지도 못했다. 노트북 화면 너머로만 만났던 가영의 실물은 생각보다 작았고, 씩 웃을 때 귀여웠던 기억. 가영이 나보다 한 살 많고, 꽤 많은 영화를 보는 것 같고, 시를 써 내려갈 때 누구보다 용감하게 이 세계와 마주할 것을 알고 있지만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는지, 언제 어떤 순간에 기 쁨을 느끼고 어떤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고 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가영 의 시 안에서 파생되는 ‘어떤 것들’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정확히는 그것을 발견해내고야 마는 시인의 시선과 미학적 입장에 관해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음을 이 글로 말하고 싶다.
입장이라는 말은 문학의 아름다움과 어떻게 결부되는가. 사실 입장이라는 것은 때로 피부의 문제가 된다. 피부는 ‘나’라고 부르고 싶은 범주의 끝이며, 이곳에 고스란히 노출된 생명의 윤곽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것, 실재하는 육체의 ‘끝’이자 내가 당면하고 있는 이 상황 안에서 세계와 대응(혹은 조응)하는 경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칭과 육체에 대한 사유가 시인들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공통 과제처럼 되어버린 지금, 우리에게 ‘피부’ 혹은 ‘끝’은 새로운 맥락 위에 놓여야 할 단어들이 된 것만 같다.
그렇다면 아주 투명한 몸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 ‘나’라고 부르고 싶은 무수한 것들이 반영된 채, 거울처럼 세계를 마주하며 빛나고 있는 피부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의 성질을 얻어 강처럼 흘러가는 피부는 결국 눈물처럼 흐를 것이다. 또 다른 얼굴 위에서. 그러므로 가영의 시들은 가두는 시가 아니라 흐르는 시. 표면 위로 타고 흐르는 시. 번개처럼 번뜩이는 사이에 희미한 연결을 기약하는 시. 나의 범주라는 것은 결국 ‘나만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악력을 놓았을 때, 무궁무진하게 확장되는 것임을 가영의 시를 통해 느꼈음을 고백한다. 파국 너머의 시, 지옥 너머의 시. 파국과 지옥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똑바로 바라보려(「인과」)” 하는 사람이 여기 있음을 알리고,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삶에서 “어디라도 떠들썩하다는 것은 좋은 일(「소란」)”이라 말하는 의지를 밝히는 솔직한 시.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말들이 자연히 떠오른다. 가슴 속에서.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게 무엇이든.
“수만 개의 창의성은 대체 어떤 나무에서 뻗어나온 가지(「일어난 일」)”인지 물어오는 발화. 이번 동인시집을 통해 발표된 가영의 시편들 가운데 가장 놀라웠던 표현이었다. 그것은 “선한 뿌리에 대한 믿음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만 허용된 종류의 육체성일 것이다. 거칠고 무질서하고 인간의 한계를 되묻는 세계의 정황들 안에서, 모든 것들의 끝을 염두에 두면서, 동시에 끝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시인이다. 나는 가영과 모국어라는 끝을 공유한다. 함께 시를 쓴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오랜 위안이 되었으면, 천천히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즐거움이 되기를 마음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