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지지 않으려 심은 식물
신헤아림. 이 이름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했다. 헤아림이라고 해야겠지? 그리고 처음 몇 번은 헤아림 님이라고 불렀다. 채팅방에서, 줌 미팅에서. 내가 이렇게 불렀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그런데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아림 혹은 아림 님이라고 불러, 나도 대세를 따라 아림 님으로 수정하여 불렀다. 하지만 생략한 ‘헤’가 못내 걸렸다. 헤아림으로 불러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그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화상으로 만나 서로의 시를 살폈다. 처음 그의 시를 보았을 때, 나는, 낭만적이네요, 하고 말했다. 시를 처음으로 배웠을 때 내가 느꼈던 시의 낭만이 그의 시에 있었다. 주워들은 옛 노래를 망국의 화폐를 흔들며 취한 채 흥얼거리는 화자가 나오는 그의 시. 내 것인 줄 알았던 모든 사랑이 수많은 전생을 지내고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그의 시. 쓸쓸하지만 쓸쓸하지만은 않고, 과잉되었지만 과잉된 것만은 아닌 채 현존하는 그의 시. 나는 그가 헤아려온 시간을 충분히 살펴보지 못한 채 그것을 낭만이라고 축약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잘 모르는 것만큼이나 나에 대해 모르는 그가, 나에게 써준 시는, 뭉클했다. ‘나는 당신을 아는 사람처럼 소개했습니다’라고 화자는 말한다. 나도 공통점 소속이 아닌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할 때는 퍽 잘 아는 사람처럼 소개할 것이다. 이분은 신헤아림 님인데, 아림 님이라고 부르면 돼요. 낭만파예요. 말할 때 조곤조곤해서 귀를 잘 기울여야 해요. 그렇게. 하지만 역시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마치 내가 견뎌온 시간을 헤아려 본 사람처럼 썼다.
그간의 생활에 대해
생활을 관찰하는 슬픔에 대해
그걸 버티던 두 다리도
두고 왔다고
쓰러지지 않으려 심은 식물이
아주 조용히
자라고 있다고 했습니다
―「돌고개역」 중에서
이 부분을 읽을 땐 눈가가 조금 뜨거워졌다. 생활을 관찰하는 것이 슬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어서. 오롯이 두 다리로만 버텨본 시간을 알아주어서. 식물을 키운다는 것이 쓰러지지 않으려는 사람의 의지라는 것을 알아주어서. 그렇게 키우는 식물이 아주 조용하게 자라고 있다는 희망을 주어서. 당신은 ‘오래된 기물’처럼 버텨온 사람들을 알아주는 시를 썼다. 당신의 이름처럼. 그런데도 시 말미에는 시치미를 뗀다.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단정 지어 말하는 것이 실례인 줄 안다는 듯. 버티는 생활이 상대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듯.
기차가 돌고개역을 지납니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알았던 사람처럼
말하게 되는데
당신과 상관없는
오래된 기억들만
중얼거리게 됩니다
―「돌고개역」 중
기차는 돌고개역을 지나고, 당신은 아주 조용하게 버티고 견디는 사람들에 대해 ‘알았던 것처럼’ 말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당신은 정말 그 사람들을 온전히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당신과 상관없는 오래된 기억들만 중얼거’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당신의 이름을 보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헤매지 않는 것처럼 확신할 수 있다. 당신이 타인과 상관없다고 말하는 그 오래된 기억들도 결국은 ‘오래된 기물처럼’ ‘비슷하게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헤아리는 기억일 거라고. 그러니까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가사가 좋은 옛 노래들, 무수한 전생들이 실은 여전히 고요하게 고통을 견디는 타인들을 위한 거라고 확신한다.
헤아림. 이번만큼은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이렇게 불러 봅니다. 적어도 당신이 제게 써준 시는 쓰러지지 않으려 심은 식물과 아주 닮아 있습니다. 이 시는, 땅 위에 버티고 서 있는 저의 나날만큼이나 제 안에서 조용히 자랄 것 같아요. 언젠가 스스럼없이 당신을 헤아림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커다랗게 자란 식물을 건네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