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수프의 거리1) 2)
저는 지금 숲에 왔어요.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리는 숲속은 질퍽하고 또 싱그러워요. 축축한 공기 속에 스민 풀 냄새를 정신없이 맡다가 이상하게 생긴 나무를 만나 사진도 찍었습니다. 커다란 나무에 달린 작은 잎사귀를 만지고 작은 나무에 달린 커다란 잎사귀도 만졌어요. 대낮에도 숲속은 어둡고 울창하지만 무섭지는 않습니다. 이곳에는 크고 깊은 호수가 있거든요. 호수에서 헤엄치는 오리와 물고기를 바라보면 무섭지 않아요. 오리와 물고기는 숲속보다 더 깊은 물속도 헤엄치니까요. 오리가 지나간 자리마다 물결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숲 한가운데에서 수프를 끓입니다. 수프를 끓이려고 작은 냄비를 가져왔어요. 크림수프 가루를 우유에 곱게 저미고 조그만 감자를 큼직하게 썰어요. 바람이 불어 수백 그루 나무의 잎사귀들이 흔들리고 제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스칩니다. 머리카락을 머리에 돋아난 잎사귀 같은 거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아니면 숟가락을 타고 흐르는 한 입의 수프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이 부드럽고 또 따뜻한 감자수프는 제 머릿속에 주렁주렁 뻗어난 기억의 뿌리 중 가장 여리고 귀여운 것입니다.
제 블로그에는 일기를 모아둔 폴더가 있어요. 그곳에 쓰인 최초의 일기는 2012년 7월 5일입니다. 마지막 일기는 2022년 7월 5일이고요. 첫 날과 마지막 날이 같다니 신기하죠.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빤한 장치 같은 일도 나에게 일어나면 신기한 일이 돼요. 아무튼 십 년이 담긴 그 폴더의 2013년 12월 23일 일기를 보면 바로 지금 제가 끓이고 있는 수프 이야기가 나옵니다. 감자수프 레시피라거나 수프를 먹은 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수프에 깃든 이야기랄까요.
예를 들면 나무에 달린 게 잎이 아니라 수백 마리의 새라고 생각해 봐요. 바람이 불어 잎사귀들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수천 마리 새의 날개짓이라 생각해 봐요. 그런 나무가 수만 그루 심어진 숲에 들어와 있어요. 이팝나무의 꽃잎들이 눈처럼 내린 숲에서 길을 잃는다는 생각조차 없이, 아무 확신도 없이, 그래서 망설임도 없이 걷는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짐작이 가실까요. 물론 이건 숲에 깃든 이야기입니다.
일기는 비밀 게시물로 설정돼 있습니다. 당신께 이 일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맛있는 수프 한 그릇을 끓여 대접할 수는 있지요. 저는 큼직한 감자가 다 익을 때까지 수프를 뭉근하게 끓입니다. 너무 걸쭉해지지 않도록 중간에 우유와 물을 조금씩 추가하고 있어요. 국자로 당신의 얼굴을 그리며 수프를 젓습니다. 국자를 따라 당신의 얼굴이 수프 위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고 합니다.